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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진로] ④좋은 직업보다 오래가는 능력

더에듀 | 인공지능과 입시 경쟁이 한꺼번에 뒤엉킨 시대, 학생과 학부모, 교사는 진로 앞에서 더 많이 흔들리고 있다. 이에 <더에듀>는 '좋은 대학'과 '안정적인 직업'이라는 좁은 기준을 넘어 아이가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당장 꿈이 없어도 괜찮은 이유, 성적과 적성 사이의 간극, 문해력과 진로의 관계, 오래가는 능력과 직업 선택의 현실 등을 차분하게 짚어나간다.

 


지금 당신이 쥔 명함, 언제까지 쓸 수 있을까


직장 명함은 결국 반납해야 한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는 명함 위에 적힌 직책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직장이 나를 증명해 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조직이 내 밥그릇을 책임져 줄 것이라는 기대로.

 

그 밥그릇이 누구 손에 쥐어져 있는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나는 수의사다. 20년 넘게 동물병원 현장에서 일했다. 그 직업은 여전히 내 것이지만, 나를 버티게 해주는 건 ‘수의사’라는 직함이 아니다. 그동안 배웠던 지식과 내 몸에 각인된 수많은 경험이다. 나아가 읽고 쓰고 말하며 쌓아온 것들이다. 강연을 준비하면서 길러온 언어. 글을 써오며 단련된 사유. 경험을 구조화하는 습관. 이것들은 어느 조직도 가져갈 수 없다.

 

 

책 ‘결국 잘되는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차이’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들 각자가 쌓은 다양한 경험과 노하우까지 회사가 머릿속을 해킹하거나 태도를 본뜨는 방법으로 빼앗아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 사람들 고유의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만의 것’을 발판으로 그 이후의 삶을 설계했다.”

 

좋은 직업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래가지 않는다. 직업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고 시대에 따라 사라지기도 한다. 오래가는 것은 직업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다.


어떤 능력이 오래가는가


거창한 자격증이나 스펙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오래가는 능력은 세 가지다.

 

‘배우는 능력, 기록하는 능력, 버티는 능력.’

 

이 셋의 공통점은 단 하나, 직장이 아니라 사람에게 붙어 있다는 점이다.

 

우선 ‘배우는 능력’은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아내는 힘이다.

 

병원은 해마다 풍경이 바뀐다. 신약이 나오고, 검사 장비가 바뀌고, 보호자가 들고 오는 정보의 수준도 달라진다.

 

요즘 보호자들은 병원에 오기 전에 이미 인공 지능 검색을 하고, 영상을 보고, 카페 글까지 훑고 온다. 그 보호자 앞에서 5년 전 지식만으로 설명하는 수의사는 금세 바닥을 들킨다.

 

어떤 직업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평생 먹고사는 시대는 끝났다. 학위가 있어도 다시 배우지 않으면 능력은 녹아 사라진다. 반대로 학위가 없어도 매일 배우는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든 길을 낸다. 배움이 멈추는 순간 능력도 멈춘다.

 

다음, ‘기록하는 능력’은 자기가 한 일과 생각을 흔적으로 남기는 힘이다.

 

기억은 빠르게 휘발된다. 어제 점심도 흐릿한데 한 달 전 일이 또렷할 리 없다. 흔적이 남지 않으면 자기 안의 무엇도 자기조차 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곧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나는 마흔이 되어서야 기록을 시작했고, 매일 한 줄을 남긴 그 습관이 책과 칼럼과 강연으로 자라났다. 거창한 시작은 없었다. 한 줄이 쌓여 능력이 됐을 뿐이다.

 

마지막 ‘버티는 능력’은 결과가 보이지 않는 시간을 견디는 힘이다.

 

모든 능력은 처음에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 책 한 권 읽었다고, 글 한 편 썼다고 인생이 바뀌진 않는다. 매일 같은 자리를 도는 것 같은 시간이 길게 이어진다.

 

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을 자주 본다. 만성 질환을 앓는 환자는 한 번의 치료로 좋아지지 않는다. 보호자가 몇 달, 때로는 몇 년을 묵묵히 같은 약을 챙기고 같은 검사를 반복해야 환자의 삶이 비로소 바뀐다.

 

사람의 능력도 다르지 않다.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멈추는 사람은 능력을 가지기 전에 흩어진다. 견딘 사람만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는다.

 

이 세 가지는 어떤 직업 위에서도 작동한다. 직업이 무엇이든 그 위에 이 세 가지가 얹히는 사람은 자기 일을 자기 방식으로 만들어간다. 직업의 종류가 사람을 결정하는 시대는 지났다. 그 직업을 다루는 사람의 능력과 태도가 사람을 결정한다.

 

리언 메긴슨(Leon Megginson, 전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은 이렇게 말했다.

 

“가장 지적인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가장 강한 종이 살아남는 게 아니라 가장 잘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

 

지적이거나 강한 사람이 아니라 적응하는 사람이 오래 간다는 것이다. 적응이라는 한 단어 안에는 앞서 말한 세 능력이 다 들어 있다.

 

배우는 능력은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는 적응이고, 기록하는 능력은 자기 변화를 흔적으로 남기는 적응이며, 버티는 능력은 그 변화가 결실이 될 때까지 시간을 견디는 적응이다. 결국 오래가는 사람은 잘 적응하는 사람이다.

 


어른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가 아이에게 물려줘야 할 진짜 유산도 여기에 있다. 시험 점수보다, 좋은 학교의 명패보다, 결국 아이의 평생을 받쳐 줄 것은 이 셋이다.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배우는 자세, 자기가 겪고 생각한 것을 글로 남기는 습관, 결과가 더디 와도 멈추지 않는 끈기. 부모와 교사가 아이의 손에 쥐어줄 수 있는 가장 오래가는 선물이다. 학원 한 군데를 더 보내는 것보다, 이 셋을 매일 조금씩 키워주는 일이 훨씬 멀리 오래 간다.

 

좋은 직업을 찾는 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어떤 직업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 먼저다. 그 능력이 있으면 직업이 바뀌어도 길을 잃지 않는다.


박근필 = 임상 수의사로 20년 가까이 현장을 지키며 생명과 삶을 가까이에서 마주해왔다. 마흔에 글쓰기를 시작해 저서 4권을 펴냈다. 강연가·커리어 스토리텔러로서 진로·커리어·독서를 주제로 청소년과 학부모, 직장인을 만나고 있다. 칼럼니스트로 여러 교육·독서 매체에 칼럼을 연재 중이며, 박근필성장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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