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정은수 객원기자 | 2025년도에 고교학점제 전면 도입을 앞두고 여러 우려가 나오고 있다. <더에듀>는 우리보다 앞서 고교학점제를 시행하고 있는 곳은 우리가 걱정하는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기 위해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고교 학점제 현장 사례를 소개한다. |

여기까지 얘기하고 나니 큰 의문 하나가 남는다. 결국 입시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못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입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고교 현실
바로 앞서 말한 재수강이나 재평가, 과제 피드백 후 수정 제출도 입시의 공정성 논란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것이고, 13학년을 다니는 일도 입시 때문에 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그에 앞서 말한 교육과정이나 평가의 자율성도 마찬가지다. 교사가 마음대로 평가 기준을 정하고 평가를 한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안 가르치고 다른 내용을 가르친다? 입시 때문에 학부모들이 난리가 난다고 할 것이다.
학교 선택권도 결국 대학 입시에 유리한 고교를 선택하기 위해 고교 입시 경쟁이 생긴다고 할 것이고, 계열별 과정 운영도 우열반 편성으로 입시에 유불리가 생긴다고 할 지도 모르겠다.
다 맞다. 우리 고교 교육은 결국 입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입시가 원흉이니 입시를 바꾸면, 혹은 아예 입시를 안 하면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결국 비슷한 뭔가가 그 자리를 대신해 교육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제도는 그 사회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입시 제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입시제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거나 온타리오주의 입시 제도를 소개할 필요는 없다. 사실 앞서 학점제와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소개하기도 했고.
저신뢰 사회가 빚어낸 결과물
물론 혹자는 말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입시제도를 위정자가 만들었다고. 때로는 정부가 사회의 요구를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된 대안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 금방 사회적 역풍을 맞고 실행에서 온갖 걸림돌에 넘어지고 수정된다.
결국 살아남은 제도는 사회가 받아들이는 제도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입시 제도의 바탕에는 많은 사회적 신념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깔려 있다.
기계적 공정성에 대한 집착이 대표적이다. 전문가의 판단보다는 내 기분이 중요한 문화도 한 몫할 것이다. 교과서나 국가시험의 권위에 대한 과도한 추종도 있다. 모두가 같은 시기에 같은 것을 해야 한다는 획일적이고 불포용적인 경로에 대한 신념도 있다. 조금만 거슬리면 알아보지도 않고 달려들어 몰매를 때리고야마는 멍석말이 문화도 교사와 교육당국을 위축시킨다.
이런 신념과 문화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한 결과가 우리의 입시 제도다. 사회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교사의 평가권도 교육과정 운영권도 독립적일 수가 없다. 학생의 진로 선택도 진학 시기도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제도가 아니라 사회다.
입시와 관련된 우리 사회의 여러 비뚤어진 신념과 문화는 두 가지로 축약될 수 있다. 하나는 저신뢰다. 전문가인 교사나 학교에 대한 신뢰가 없다. 사실 교사와 학교에 대한 신뢰만 없는 게 아니라 사회 전체가 저신뢰 사회다. 기계적 공정이 아니면 믿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진로가 아닌 신분 상승을 위한 진학
또다른 하나는 입시를 성공적인 삶 혹은 계층 상승의 대표적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도 저신뢰 사회에서 기계적 공정을 잣대로 기회를 주는 통로가 입시라고 여겨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 성공 방정식이라는 신념에 한정해서 생각해보자.
입시가 유일한 계층 사다리가 아니라면 아직 전체적인 사회의 신뢰가 쌓이지 않았어도 적어도 학교의 교육과정 운영과 평가에 기계적 공정을 찾으면서 학부모들이 그리 민감해하는 일은 덜했을 수 있다.
학생도 입시를 통한 성공이라는 경로가 아닌 인생계획을 세울 수 있다면 모두가 똑같이 어떤 시기에 뭘 해야 한다는 획일적인 매뉴얼과 사회적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신념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도 우리 사회의 현실에 있다.
속이면 언젠가 손해를 보는 사회
한 번 그동안 고교학점제를 살펴본 온타리오주의 모습을 보자. 이곳에서는 기계적 공정 같은 건 없다.
취업은 아는 사람의 추천이 최고의 스펙이다. 취업 지원 시 경력 증빙은 이력서로 끝이다. 교사는 심지어 프랑스어 교사 같이 특수한 자리가 아니면 외부 채용이 아닌 내부 채용이 기본이다. 아는 사람 뽑는다는 얘기다. 다만, 두세 사람의 추천인을 받는다.
그러면 편법이 난무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허위로 제출할 경우 그에 따른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처럼 대충 벌금이나 내고 허위학력을 얼버무릴 수 없다. 평생 그 업계에 다시는 발도 못 붙인다.
심지어 연말 정산할 때 세금 신고도 몇몇 기본적인 자료 외에는 증빙 서류를 받지 않고 우선 처리한 다음, 그 중 표본을 대상으로 사후 증빙 서류를 요구하는데 이 때 허위라는 게 밝혀지면 미납 세금 추징으로 끝나지 않고 징역까지 살게 될 수 있다.

출신 대학과 직업에 귀천이 없는 사회
또, 여기서 교사가 되려면 4년제 대학을 나오고 2년제 교대를 또 나와야 한다. 그런데 벌이는 2년제 전문대 나온 자동차 수리공보다 많지 않다. 전문대에서 3년제 행동과학과를 나와서 교육 보조로 취업해봐야 벌이는 1년제 조리사 과정을 나온 친구보다 적다. 물론 풀타임 자리를 구하는 것조차 더 어렵다.
솔직히 교육직이 좀 저임금이기는 해서 비교하기 쉬운 면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가 열심히 한다면 편안히 먹고 살 만큼은 벌 수 있는 사회다.
벌이는 그렇다치고 학력이 낮다고 일이 더 힘들까? 꼭 그렇지도 않다. 저학력직도 대부분 일찍 퇴근한다. 못 배운 사람이라고 늦게까지 부려먹는 일은 없으니 당연히 시급이 낮지 않은만큼 늦게까지 일할 이유도 없다. 육체노동이라고 해도 골병나도록 시키지도 않는다.
학력 또는 학벌이 못하다고 생활이나 소득이 못한 게 아니니 기를 쓰고 대학 혹은 명문대를 가려고 할 필요가 없다. 사회 전체적으로 입시 경쟁이 없으니 교사가 스스로 판단한 학점에 따른 내신을 중심으로 한다고 해도 입시에 논란이 안 생기는 것이다.
나이로 위아래를 가르고 선후배를 따지지도 않고 취업에 연령제한도 없는데다 무엇보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으니 한 해 더 걸린다고 문제될 게 전혀 없다. 회사에서 은퇴한 노인이 주정부 말단 창구직 공무원으로 재취업을 하기도 한다. 대학이나 전문대에 만학도가 많은 이유다.
한 가지 일을 하다가 또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서 업종을 바꾸는 경우도 많고, 그렇게 업종을 갈아타서 신입으로 시작해도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소득이 적지 않다. 수학 교사를 하다가 보험 설계사가 되기도 하고, 자동차 정비 일을 하다가 교사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어떤 시기에 대학을 꼭 가야 하고, 그래야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사회에서 좋은 교육이 꽃핀다
물론 당장 온타리오주처럼 우리도 누구나 먹고 살만한 사회를 만들자거나 거짓말은 허용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자고 구호만 외치면 뜬구름 잡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여태까지 얘기는 온타리오주와 같은 사회에서나 가능한 모습이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도 지금까지 뜬구람 잡는 소리를 한 셈이 된다.
불신과 불안으로 인한 저신뢰와 획일적 성공 방정식이 문제라면 사회를 더 공정하고 자유롭게 바꾸는 일을 해야 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몫이다. 교사가 아니어도, 교육 정책을 하는 사람도 아니어도 된다.
물론 사고나 가치관은 오랜 역사와 문화가 있어야 만들어지고 사회 전체의 소득 구조나 제도적 뒷받침도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없지만, 느리더라도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리고 사실 사회는 벌써 어느 정도 바뀌고 있다. 적어도 예전보다는 사회가 많이 공정하고 투명해졌다. 사람들의 신뢰도 한 번씩 무너지기는 해도 예전보다는 많이 쌓이고 있다. 아직도 미꾸라지들은 곳곳에 남아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뭐를 대놓고 하면 잘못인지에 대한 인식은 확실히 달라졌다.
진로의 다양성의 관점에서도 세상은 바뀌고 있다. 평생 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전에 천하게 여길 법한 직업이 인기가 있기도 하고, 고졸로 대졸 못지 않게 돈을 벌 수 있는 일도 늘고 있다. 더 이상 명문대를 거쳐 대기업에 취업하거나 고시를 붙는 것만이 좋은 삶의 방법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들이 우리 교육이나 현실에서 덜 느껴지는 건 여전히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실제 달라진 사회의 변화를 오랜 시간 형성된 문화의 변화가 쫓아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를 좀 더 빨리 가져오기 위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나부터 함부로 말을 옮기지 않고 비난하기 전에 좀 더 사실을 확인하고 일을 할 때는 최선을 다하고 정직하게 하면 된다.
이제는 성인으로서 자기 몫을 잘해내고 있는 청년이 있다면 학력이나 직업으로 천시하지 않고 훌륭한 어른으로 대우해주는 모습을 보이는 태도와 인식의 전환도 필요하다. 그렇게 세상에 다양한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길들을 터줘야 한다.
갑자기 고교학점제 얘기하다가 공자왈이나 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하고 작아보이지만 쉽지 않은 이런 실천들이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결국 사회가 바뀌어야 입시가 바뀌고, 입시가 바뀌어야 고교학점제의 취지를 더 잘 살릴 수 있을 것 아닌가.

사회 변화에 제도의 몫도 있다
물론 제도는 사회가 빚어낸 작품인 동시에 사회를 빚어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그러니 제도의 몫도 있다. 제도가 무조건 반영만 한다면 뭐하러 고민해서 도입하고 논란을 겪고 하겠는가. 제도는 사회 변화의 동력을 제공할 수도 있고 이미 변화한 현실을 인식시켜줄 수도 있다.
아마도 고교학점제를 도입한 것도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한 변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도가 그 몫을 제대로 하려면, 지금도 많은 숙고와 검증을 거쳤겠지만, 다시 현장의 우려를 해소하는 대책을 찾거나 새로운 개선점을 찾아볼 필요도 있겠다.
온타리오주라고 해서 완벽한 제도를 가진 게 아니다. 올해도 필수 학점 구성이 '또' 바뀌었다. 단순히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STEM과 온라인 필수의 확대만이 아니다. 기존 1, 2, 3 교과군 구분을 폐지하고 구체화했다. 뭔가 고칠 게 있었다는 얘기다.
계열 통합도 진행 중이다. 계열화가 제공하는 효율성이 있었지만, 일부 학생의 진로를 제한하는 결과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로는 열려 있기는 했어도 실제로 한 번 듣기 시작한 계열에서 다른 계열로 가는 학생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장벽을 없애겠다고 계열을 없앴더니 이번에는 충분한 개별화를 할 수 없는 환경에서 계열을 없앴다고 이게 또 저성취 학생이나 경증 장애 학생에게 오히려 제대로 학습할 기회 없이 과목만 이수하게 만드는 차별로 작용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처럼 제도의 효과는 예측하고 기대할 수는 있어도 정확히 미리 알 수는 없기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쳐가는 수밖에 없다. 고교학점제를 고쳐갈 때 지금까지 살펴본 온타리오주의 고교학점제에서 참고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한 달여간의 여정도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