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지금 이 순간에도 한 교사는 교실 앞에서 망설인다. 지도를 해야 할지, 아니면 참아야 할지.
아이의 거친 말투, 친구를 향한 무례한 행동을 보며 ‘바로잡아야 한다’는 직업적 양심이 먼저 떠오르지만, 곧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괜히 지적했다가 학부모 민원이 들어오면 어쩌지.’
‘혹시 아동학대로 오해받지는 않을까.’
이 망설임 끝에 지도는 멈추고 교실의 질서는 조용히 무너진다. 교사는 아이를 가르치기 전 민원을 먼저 계산하는 사람이 된다. 기본 예절을 말해도, 질서를 세우려 해도 “왜 우리 아이만 지적하느냐”는 항의와 “아이의 기를 죽였다”는 민원 앞에서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 결과, 오늘날의 교실에는 ‘지도받지 않는 아이’와 ‘가르칠 수 없는 교사’가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기묘한 풍경이 자리잡았다.
물론 민원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정당한 문제 제기는 교육을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통로이다. 그러나 지금의 민원은 점점 ‘개선 요청’이 아닌 ‘통제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교사의 전문성과 판단은 존중받지 못한 채, 지도 과정 전체가 ‘감정의 잣대’로 재단된다. 학생은 보호받고 있지만, 교육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이 아니다. 신뢰이다.
“우리 아이를 가르쳐 달라”는 사회적 믿음, 교사의 판단을 교육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공동체의 신뢰 위에서만 교실은 바로 설 수 있다. 교사가 중심을 잡을 수 있어야 아이도 중심을 배운다. 교육은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일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교사를 감시하는 제도가 아닌 교사를 지켜주는 시스템이다. 지도가 가능한 교실, 훈육이 허락된 공간, 실수해도 설명할 수 있는 기회. 이 모든 것은 교사를 위한 특권이 아닌,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교사를 지키는 일은 결국 아이를 지키는 일이다. 가르칠 수 있어야 배울 수 있다. 민원보다 교육이라는 상식이 교실로 돌아올 때, 무너진 교실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