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18년간 기자 생활을 하다 소위 말하는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되어 교육감을 보좌하는 비서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반절 가량을 글쓰기란 업을 갖고 살아왔는데, 새 옷을 입고 여러 가지 이유로 한동안 글쓰기를 멈췄습니다. 그러자 내 마음 한구석에 공허함 그 비슷한 마음이 자리 잡았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책 한 권을 읽고 에세이를 써보기로 다짐했습니다. 지난해 2월 호기롭게 시작한 이 다짐은 지금도 꾸역꾸역 이어가고 있습니다. 책을 통해 내 안의 나와 만나는 일은 제 삶을 더욱 반짝이게 한다는 걸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

모처럼 늦잠을 실컷 잤다. 눈을 뜨니 아직 자는 딸아이 볼이 눈 안에 들어온다. 찐빵처럼 포동포동했던 볼살은 다 어디로 가고 제법 갸름해진 얼굴엔 소녀티가 난다.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자는 아이 볼을 튕겨 본다. 눈을 찡그린다.
아침마다 일어나라고 깨울 때마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발을 탕탕 구르는 사춘기 소녀로 돌변할까 두려워 서둘러 방을 나온다.
이번 주는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 로빈슨 공저인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를 골라 1부를 읽다 말았다.
아무리 독서의 효능과 장점이 차고 넘친다지만, 만사가 귀찮고 피곤할 땐 정치·경제 자기계발서보다는 읽기 쉽고 가벼운 에세이가 딱이다.
벌써 5권째 머리말만 끄적이다 책을 도로 덮는다. 도저히 집중이 안 돼 집 앞 헬스장으로 향했다. 러닝머신을 달리면서도 마감의 압박이 밀려온다. 저번에 한 번 읽다 만 이정아의 ‘이토록 다정한 사춘기 상담소’를 러닝머신 모니터 위에 놓고 읽기 시작했다.
새 일을 시작한 후 핸드폰을 갤럭시 폴드로 바꿨는데, 액정을 펴면 나오는 큰 글씨는 전자책 읽기에 좋고 평소 메모 습관과 계획 관리에 아주 유용하다.
“참나 러닝머신을 뛰며 음악이 아닌 전자책을 읽다니, 나 참 많이 변했다.”
‘이토록 다정한 사춘기 상담소’의 저자 이정아는 유치원 교사와 방과 후 교실에서 12년간 교사로 일했고, 육아종합지원센터 등에서 2천건 이상의 부모 상담을 진행했다. 교육학 석·박사를 마친 후, 국제대 유아교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금껏 내가 잘못 키운 걸까?’, ‘사춘기의 감정부터 사춘기의 관계’, ‘사춘기 스트레스’, ‘사춘기의 꿈과 진로’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실 책 속 내용은 평소 오은영 박사가 나오는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프로그램에서도, 교육청 출입 기자로 일하면서도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사춘기 자녀에게 ‘시시콜콜 캐묻지 말기’, ‘충분히 들어주기’, ‘지나친 관심 갖지 않기’ 등 통상적인 이야기 말고 ‘뾰족하고 마법 같은 솔루션이 없을까?’ 하고 답답해하며 러닝머신 속도 버튼을 3.5에서 5로 올리던 참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가 책 속에 나온다. 조금 지루하던 책이 이제야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알아서 한다고!”
“네가 알아서 한다고 하고 한 번이라도 알아서 한 적 있어? 뭘 어떻게 할 건데?”
우리 집 남자 둘, 15살 아들과 46살 큰아들이 걸핏하면 내게 하는 말이다.
“엄마는 몰라도 돼”, “내가 알아서 할게”, “내 마음이야”, “어차피 엄마도 잘 모르잖아”라는 말은 엄마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습니다. 마치 자녀가 독립해서 집을 떠났을 때 양육자가 경험하는 외로움과 상실감을 일컫는 빈둥지 증후군과 비슷한 마음을 느끼기도 합니다. 허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괘씸합니다. 그러나 엄마의 입에서 “모르긴 뭘 몰라?”, “네가 알아서 한다고 하고 한 번이라도 알아서 한 적 있어?”, “엄마도 엄마 마음대로 한번 해볼까, 어떻게 되는지?”라는 말이 나오면, 대화는 이미 끝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분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지요. p137
‘내가 분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그건 아닌데···.’
고개를 갸우뚱하며 러닝머신 속도를 늦췄다.
어느새 땀이 흥건하다. 나도 모르는 새 분노에 사로잡혔을까? 그러고 보면 46살 B와 대화 중 은근히 열받는 포인트가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한마디이긴 하다. ‘그래도 정말 분노까진 아닌데···.’ 러닝머신을 뛰며 읽길 잘했다는 생각을 몇 번씩 했다.
종이책으로 읽었다면 너무 교과서적이고 모범 답안이라 끝까지 못 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자는 자녀를 기숙사가 있는 국제중에 보냈다. 학창 시절에 전교 1, 2등을 할 정도로 수재였다고 하니, ‘사춘기 아이들의 격정적이고 다이내믹한 사례를 직접 경험하진 않았을 것 같다’라는 생각도 든다.
‘눈물 쏙 빠지도록 절절하고 드라마틱한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나 대화 등을 실어주었다면 더욱 가슴에 와닿았으려나?’
저자는 아주 친절하게도 ‘이토록 다정한 엄마의 말 연습’도 책에 실었다.
X “네가 알아서 한다고 하고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한 적 있어?”
○ “걱정이 돼서 한 소린데 잔소리처럼 들렸나 보네. 물론 엄마는 너를 믿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X “너 지금 문 닫고 들어가면 다신 거실에 못 나올 줄 알아!”
○ “오늘은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 혹시 혼자 있고 싶은 거야?” p181
내가 내린 사춘기 자녀를 현명하게 대하는 법에 정답은 없다!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아이와 부모의 성격과 기질에 따라 case-by-case다. 그저 진심 어린 사랑을 줄 뿐! 대가 없는 사랑을!
# 2021년 10월 19일 잠자리 대화
“엄마! 내일은 쉬어?”
여름휴가로 회사 안 간 지 5일째. 아이들이 요즘 틈만 나면 묻는 말이다.
“응, 내일이 휴가 마지막 날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딸아이.
대뜸 “난 엄마가 죽는 게 싫어. 사람은 늙으면 언젠가 죽잖아” 하고 흐느낀다.
“아냐, 난 안 죽어. 항상 난 네 마음속에 있어.”
“거짓말. 난 엄마가 너무 좋아서 안 죽고 안 늙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국수 먹을 때 끊지 말고 한 번에 후루룩 먹어.”
눈을 떠 잠들기 직전까지 온전한 엄마 노릇을 한 며칠간 ‘내가 이 아이에게 이렇게 간절했구나’ 싶은 게 가슴이 먹먹해 왔다.
# 2024년 10월 18일 잠자리 대화
“오늘 하루 재밌었어? 아들, 평일에는 게임 좀 줄이자. 책 좀 읽고.”
“내가 알아서 할게.”
중1인데 어느덧 할머니 키를 훌쩍 따라잡은 15살 아들, 이마에 좁쌀 여드름이 하나 올라온 13살 딸.
자식 키우기 힘든 세상이라고 하지만, 언젠가 사춘기보다 무서운 갱년기가 찾아올지 몰라도, 반짝이는 남매가 있어서 내 삶은 더욱 빛난다.
# 이 글은 브런치에 실린 것을 재구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