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만약 당신의 아이가 학교에서 갑자기 쓰러졌을 때, 생명을 지켜줄 보건실 문이 굳게 닫혀 있다면 어떨까.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학교의 유일한 의료전문가인 보건교사가 교실수업에 나가며 아이들의 건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보건실이 비어가고 있다. 법의 왜곡된 해석과 행정 편의주의가 만든 ‘안전 공백’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방치되고 있다. <더에듀>는 <전국보건교사노동조합>의 이야기를 통해 닫힌 보건실 문 뒤에 가려진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고, 무너진 학교 안전 시스템의 근본 원인을 살펴본다. 더 이상 2023년 대전에서와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무엇을 바로잡아야 하는지 해답을 찾아간다. 우리 아이는 오늘, 학교에서 정말 안전할까. |

프롤로그: 과거는 현재와 대화한다
역사학자 E.H. 카(E.H. Carr, Edward Hallett Carr, 1892–1982)는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우리는 과거의 사실을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현재의 시선으로 과거를 끊임없이 재해석한다.
2023년 6월, 대전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생이 쓰러져 숨졌다. 이것은 ‘과거의 사실’이다.
그리고 2025년 4월, 법원은 이 죽음에 대해 국가와 교직원에게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판결했다. 이것은 그 사실에 대한 ‘현재의 해석’이다.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실과 현재의 해석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대화 속에, 바로 지금,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맨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2025년, 우리는 2년 전 그날의 무엇을 기억하는가?
2023년 6월, 심한 두통을 호소한 학생은 담임교사의 인솔로 보건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보건교사는 교실수업으로 인해 보건실에서 아이를 살필 수 없었다.
이후, 보건실 대체 교사가 아이를 담임교사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홀로 엘리베이터에 태웠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몇 분간 고통스러워하던 영상이 남았다. 그리고 아이가 쓰러진 뒤에야 수업 중이던 보건교사가 호출되고 119에 신고가 이루어졌다.
쓰러지기 전까지 아이는 보건실과 화장실을 홀로 오가며 고통 속에서 구조의 신호를 보냈지만, 아이의 신호를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아이가 구토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청소 미화원만이 아이를 부축해서 다시 보건실로 보내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모든 사실은 그날을 구성했던 무수한 순간 중 일부의 조각에 불과하다.
흔히, ‘사실은 스스로 말한다’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이란 선택되어 말을 걸어올 때만 이야기할 수 있다.
‘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인지’, ‘어떤 순서와 맥락으로 이야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23년 6월의 그날을 구성하는 수많은 사실 중 대전지방법원이 선택한 사실은 무엇이었을까?
판결문은 이렇게 말한다.
- “국가는 보건교사를 배치했고, 사건 당일 보건교사는 학교에 근무했으니, 국가의 의무는 다했다.” - “대체 교사 등에게 응급처치 교육을 했으니 학생 보호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다.” - “뒤늦게라도 보건교사가 119에 신고했으니,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 “소아 뇌출혈은 빈도가 극히 낮아 예측하기 어려웠으니, 학교 응급 의료체계가 어떻게 작동했는지와 무관하게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 “어차피 아이가 정상적인 보건실 간호를 받았다 해도 그 결과값은 다르지 않았을 테니, 보건실 기능 혼란을 따질 필요가 없다.” |
이 모든 문장은 결국 하나의 결론을 향한다.
‘절차는 있었고, 보건교사 배치는 되었으며, 결과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니 국가의 책임으로 보기엔 힘들다’라는 것이다.
다만, 엘리베이터에서 찍힌 영상 기록으로 인해, 아이가 혼자 고통스러워하는 3분의 시간을 법원은 무시하지 못했다.
아이가 혼자 고통스러워했던 긴 시간 중 오직, 영상으로 남은 3분 만이 법원에 의해 ‘의미 있는 사실’로 선택되었다. 그래서 아이를 ‘홀로 엘리베이터에 태운 행위’만이 ‘다소 부적절했다’라며 대체 교사에게 1000만원의 위자료에 해당하는 책임을 물었다.
이 해석을 통해 우리는 2025년 대한민국이 ‘학교 응급 의료체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대전지방법원에 의해 재구성된 그날의 이야기는 ‘순수한’ 형태의 사실이 아니다. 생략된 수많은 사실이 있고 이야기는 굴절되었다. 그리고 선택한 사실 배열과 맥락은 매우 모순적이다.
학교가 아이의 뇌출혈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심하게 머리가 아프다’는 호소에 대하여 학교가 어떻게 대응하였는지가 오히려 중요하다.
‘두통 호소’는 학교의 보건실에서 매우 흔하기 때문에 빈도가 낮다거나, 예측이 어려웠다는 말로 책임이 소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몰랐던 대체 교사에게만 아이를 홀로 엘리베이터에 태운 책임을 물은 것은 해당 교사의 입장에서 매우 부당하고 모순적이다.
법원은 보건교사가 학교에 근무했다는 사실로 그날의 이야기를 재구성했지만, 보건교사가 보건실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선택할 경우, ‘대화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대체 교사와 보건교사의 자리바꿈은, 의료법과 응급의료법, 학교보건법 모두를 저촉하는 중요 사실임에도 법원은 많은 사실에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
끝나지 않은 대화,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25년 4월의 대전지방법원 판결은 2023년 6월의 비극과 상호작용한 하나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이 해석이 보여주는 오늘의 모습은 확률에 생명을 기대고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며 과거의 비극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위태로운 자화상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와의 대화가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E.H. 카’의 말처럼,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져야’ 하기에 우리는 다른 방식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고, 또 시작해야만 한다.
2025년 새 정부는 ‘생명과 안전이 우선인 사회’를 주요 국정과제로 선언했다.
우리가 더 나은 사회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올바른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사건 속에서 ‘무시해도 좋은 우연적 사실’과 ‘관심을 가져야 하는 참된 중요 사실’을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예측하기 어려운 다양한 응급상황 속에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홀로 헤매거나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학교 응급 의료체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기획 연재는 ‘멈추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인 과거와의 대화’이다. ‘보건교사는 왜 교실로 가야만 했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해, 보건실 기능 혼란과 방치된 우리 아이들의 안전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치고자 한다. 이 대화를 통해, 과거 속에 멈추어진 아이의 시간이, 다시 미래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시간으로 연결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박주영 = 1993년부터 초등학교 보건교사로 재직하며 30여 년간 아이들의 건강을 보살펴 왔다. 2021년부터 전국보건교사노동조합 위원장으로서 보건교사들의 권익 향상과 함께 보건실의 체계적인 운영을 위해 힘쓰고 있다. 특히, 보건실 이용자 간호의 체계화에 깊은 관심을 두고 2021년 ‘초등학교 보건실 이용자 지도 과정 분석과 보건지도 모형 제시’ 연구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보건실 지도 과정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제시하고, 체계적인 보건실 이용자 지도도 모형을 제안해 보건교사들의 전문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