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교사의 눈 - 고교학점제] 외로운 학교, 약 먹는 아이들

  • 등록 2025.10.23 18:4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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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에듀 | 올해 고1 대상 전면 도입된 고교학점제에 끊임없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새 정부도 이 같은 문제의 인식 속에 몇몇 대책을 내놨지만, 이 또한 논란에 빠지면서 가야 할 길이 험난한 상황이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맞아 고교학점제에 대한 집중 검증에 나서는 등 대책 마련에 분주한 상황이다. 이에 <더에듀>는 교사노맹 소속 교사들의 이야기를 통해 고교학점제가 현장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살피면서 교사들의 주장을 확인하고자 한다.

 


약으로 버티는 아이들에게, 나는 ‘관계’를 처방했다


“약 없이 잠을 못 자요.”

“사는 게, 제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요.”

 

학년말이 되면, 학생들은 담임교사에게 의지하며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다.

 

해가 지날수록 신경정신과 약물을 복용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것을 체감한다. 건강보험공단 자료에 의하면, 「우울증 연도별 진료인원수 전체 추이 (전국, 16~18세 합계)」는 2020년에서 2024년 사이 약 1.8배 증가했다. 경쟁 사회와 불신 사회 속에서 이미 아이들의 마음은 가난해진 지 오래다.

 

다년간 이런 아이들을 보살피며 깨달은 것은, 의외로 해답은 학급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학생 A는 만성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고 있었지만, 학급 친구를 사귀게 되며 큰 변화를 겪었다.

 

내성적인 A와 비슷한 성정을 지닌 아이들을 학급 특색 활동에서 만나도록 동선을 짜고, 학급 1인 1역을 같이 하게 만들었다. 둘은 서서히 마음을 열고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이후 함께 교내 학생 주도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학년 진급을 앞두던 어느 날, A는 내게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약 먹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요.’

 

학생 B는 학급 일기를 쓰다가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를 발견했는데, 알고 보니 그 친구는 학급에서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였다. 이후 두 아이는 그들의 공통 관심사를 토대로 학급 내 상담 소모임을 만들었고, 서로에게 애칭을 지어 주었으며, 졸업하여 성인이 된 지금도 연락하며 지낸다.

 

이따금 지역 페스티벌에 가서 자신들의 모습을 셀카로 찍어 내게 보내주기도 한다. ‘오늘 하루도 너무 재미있었어요!’라는 문자와 함께.

 

학생의 ‘자율’과 ‘선택’에 따른 교과 학습,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는 이념을 가진 고교학점제 시행 이후 7개월이 지났다. A나 B와 같은 학생들은 어떤 상황을 마주하고 있을까?

 

이제 학생들은 매 시간 수업을 듣기 위해 자리를 옮기고, 학급에서 보내는 시간이 사라진다. 교사는 A나 B와 같은 학생들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돌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교학점제는 여전히 허울에 불과한 ‘학생 중심’을 외치고 있다.

 


학생 중심일까, 학생 소외일까 - 외로운 학생들에게 고교학점제를 끼얹다


성실하고 내향적이었던 A와 B가 만약 고교학점제를 겪었다면, 그들의 하루는 어떠할까.

 

학급으로 등교하여 조회시간을 보내지만, 학급 친구와 대화를 나눌 틈도 없이 1교시 수업을 듣기 위해 이동한다. 매 교시마다 새로운 얼굴들이 가득하다. 오늘은 옆 자리 아이에게 말을 걸어 볼까 하고 고민하다가 1교시가 끝났다.

 

다시 교실을 이동해서 수업을 듣는다. 긴장해서 그런지, 깜빡 졸았다. 일어나 보니 이미 수업이 끝나 버렸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니 깨우지 않고 지나친 것이다. 놓친 수업의 필기를 빌려줄 친구는 없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급식을 같이 먹을 만한 친구가 없다.

 

게다가 오후엔 수행평가가 있다. 2024년도에는 절대평가였던 중국어가 고교학점제로 인해 상대평가 5등급제로 바뀌었다. 전 과목 수행평가 개수만 합쳐도 족히 30가지는 되는 듯하다.

 

결국 점심을 굶은 채 수행평가를 준비한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종례를 하기 위해 학급으로 돌아오지만, 종일 다른 수업을 들은 상황에서 공통분모가 없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어렵다. 집에 돌아와 다음 날 수업을 준비하고, 수행평가 일정을 체크하는 동안에도 ‘내일도 친구를 사귀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을 한다.

 

학교에는 이처럼 ‘먼저 친구에게 다가가기보다는, 은은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수줍은 유형’의 아이들이 상당히 많다.

 

모두가 수업을 듣기 위해 바삐 옮겨 다니는 와중에 모르는 사람을 챙길 여유가 없다. 담임교사는 이런 아이들과 상담을 하려 하지만, 쉬는 시간마다 옮겨 다니고 수행평가를 준비하는 아이와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 학급 1인 1역이나 학급 일기 운영조차 시작할 수 없어 외로운 친구들끼리 엮어줄 만한 시간도, 장소도, 사건도 만들 수 없다. 고교학점제 이후 매 시간, 모든 교실은 이동수업 교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상호작용을 시도할 배경인 학급 울타리가 사라지고 있다. 외로운 학교에서 아이들은 자라날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과연 이것조차 학생의 ‘자율’과 ‘선택’이었는가?


학교의 본질적 역할은 무엇인가 : 마음의 회복과 성장


고교학점제로 인해 아이들은 이른 나이에 진로를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며, 5등급제 속에서 끝없이 비교된다. 끊어진 관계와 와해된 공동체, 단절된 소속감만이 남았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업의 다양성이 아니라, 마음을 붙일 자리다.

 

외로운 학교는 결코 건강한 인간을 길러낼 수 없다. 일견 자율과 선택의 확대처럼 보일지라도, 그 이면에서 교육의 현장은 점점 더 비정서적인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교사는 다양한 수업 제공자이기 이전에 아이의 마음을 읽는 존재이고, 학교는 지식을 나누는 공간이기 이전에 마음이 자라나는 토양으로 기능해야 한다. 학급 내 소속감과 연대가 주는 힘은 상당하다. 앞서 말한 사례에서 보듯, 학급 공동체는 서로의 마음을 보듬고 성장시키는 경험의 장으로 기능한다. 그런 공간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2015 교육과정과 달리, 2022 교육과정은 ‘학기제’를 기본으로 한다. 지금처럼 학기 단위 운영이 사실상 강제된다면, 교실 공동체는 더 빠르게 해체될 것이다.

 

이미 고교학점제가 본격 시행되어 모든 학교는 내년도 반편성을 앞두고 혼란을 겪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조·종례 시간을 제외하고 담임교사, 학급 친구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게다가 진로·자율활동과 같은 창의적 체험활동조차도 학급 기준이 아닌 이동 수업으로 편성되는 극단적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앞서 말한 고립과 분절의 문제는 더욱 심화할 수밖에 없다. 고교학점제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이에 대한 고려조차 없었다.

 

선택과 자율에 매몰되어 학생이 외로워지는 제도는 교육이 아니다. 지금이라도 그 방향을 근본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제도를 지키려 애쓰는 대신, 아이들의 삶을 지키는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지예 수원 권선고 교사/ 경기교사노조 연대사업국장 te@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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