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에듀 | 올해 고등학교 1학년 수업을 맡은 어느 교사는 “학교가 폭탄을 맞은 거 같다”고 말했다.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에게 흥미와 적성에 맞는 맞춤형 수업을 제공한다는 목표로 올해부터 전면 시행됐다. 그러나 고등학교 현장의 혼란은 상상 이상이다.
새로운 정책을 처음 시작하며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진단하며 넘기기엔 학교 현장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교육은 없고 형식만 남았다
먼저 1년이 2년 같은 직접적인 요인은 학기별 교과 운영으로, 학기별로 교과별 생활기록부의 모든 기록을 마쳐야 한다는 점이다.
생활기록부의 과세특 이른바 ‘과목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을 학기마다 수업하는 모든 학생에 대해 작성해야 한다.
과세특은 학생의 교과 학습 활동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는 항목으로, 수업 중 드러난 학생의 성취 기준에 따른 성장 과정, 지식·기능·태도, 그리고 교과 역량을 중심으로 작성한다.
각 과목 교사가 직접 관찰하고 평가한 내용을 바탕으로 학생의 잠재력과 전공 관련 역량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도록 작성해야 한다.
그런데, 서울의 경우 교사 수 감축으로 2025년 학급당 실제 학생 수는 평균 30명 안팎이다. 고교학점제로 과목이 많아지면서 교사들은 학기당 3~4과목을 가르치기도 한다.
과목별로 주당 시수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한 학기에 가르치며 관찰하고 기록해야 할 학생 수에 따라 글자 수는 수십만 자에 달할 것이라 한다.
과도한 업무량도 문제이지만 과연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행위인지도 의문이다.1)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최소성취수준 보장 문제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도 보장하지 않았던 최소성취수준을 고등학교 때 어떻게 보장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다.
고등학교 시기에는 이미 문해력 습득의 결정적 시기를 지난 뒤이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문해력을 보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필자도 중학교 과학 교사로 재직했을 때 많은 학생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 우리나라처럼 1교실 1교사인 상황에서 학습 부진 학생 모두를 대상으로 최소 성취 기준을 넘도록 고등학교에서 끌어올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실제로 갑자기 고등학교 때부터 원칙을 적용해 낙제시킨다면 ‘우리나라의 학교문화 속에서 이를 수용하고 따를 학부모와 학생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위 문제 외에도 현장에서 교사들이 말하는 문제는 너무 많다.
- 결석 일수가 많은 학생이 간헐적으로 학교를 나왔을 경우 모든 과목 선생님은 그 학생을 지도 하기 위해 일제히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며, 그 학생은 오랜만에 학교 나왔다가 학교도 못 올 정도로 질려서 결국은 자퇴로 귀결됨.
- 과목별 수행평가 영역을 교육청이 지침으로 지정해 줘서 수행평가 수 많아짐.(예를 들어 영어의 경우 듣기, 말하기, 쓰기 각 영역에서 수행해야 한다는 게 지침이므로 한 학기 최소 수행을 3개 이상은 봐야 하는 상황이 됨)
- 공동교육과정(공유캠퍼스) 운영은 1년에 학기별 2과목을 운영해야 하니, 학기마다 학생 선발을 해야 하고,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업무들도 2배가 되는 상황으로 이어짐.
- 학생이 자신의 진로와 희망에 따라 과목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교는 1학기에 선택한 일반 과목의 진로 과목을 의무적으로 2학기에도 필수적 선택을 강제하고 있어 다른 과목 선택이 제한됨. |
이런 다양한 어려움으로 “고등학교 교사들은 중학교로의 이동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교육은 없고 형식만 남은 상황”이라고 했다.
학습자의 학습권 실현은 어떻게 가능한가?
고교학점제의 도입 취지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필자 또한 고교학점제의 지향점에 찬성하며 도입 취지대로 학생들의 흥미와 적성에 맞는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도 ‘학습권 실현 조건 탐색’을 연구했으며, 학습권의 개념은 아래와 같다.
학습권은 학습을 수행하는 당사자인 학습자의 주체적 입장에서 기술하는 능동적인 개념으로, 학습자가 국가나 사회에서 제공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를 포괄한다. 학습권은 학습자가 태생적으로 가진 학습하는 능력에 의한 자유와 권리를 포함하는 기본권으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뿐 아니라 학교 밖의 교육이나 비형식적 교육을 포함하여 학습자가 필요로 하는 장소와 시기에 학습자의 삶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등을 주체적으로 구성하여 능동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권리이다.2)
지금까지 우리나라 학교 교육은 학생들이 학습권을 실현할 수 있도록 충분히 보장해 왔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학습권 실현을 위해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그러나 학습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조건이 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연구 결과 학습권 실현 요소와 학습권 실현 형태는 다음과 같다.
학습권 실현 요소를 추출하면, ‘1)학습 주체: 생태적 학습능력을 가진 학습자, 2)학습 목적: 학습자의 삶과 연계된 유의미성, 3)학습 내용: 교육과정 선택과 구성권, 4)학습 형태: 학습자의 주체적 참여, 5)학습 장소: 학교 또는 학교 밖의 공간, 6)학습 시기: 나이 제한 없이 언제든지 7)교육제도: 학습권이 실현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을 들 수 있다...(중략)...학습권이 실현된 형태는 ‘학습자가 자신의 자아실현과 행복한 삶의 추구를 위해 필요한, 학습자에게 유의미한 학습내용을 스스로 선택하고 구성하여, 학습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학습방법으로, 학습하기에 적합한 장소라면 학교나 학교 밖의 다양한 곳 어디에서나, 나이와 관계없이 학습의 필요성을 느낄 경우 언제라도 학습할 수 있는 것’이다. 학습자의 학습권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국가, 교육기관, 지역사회는 학습자가 학습권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학습 환경과 학습기회를 제공하고 지원해야 하며, 교사는 학습자가 학습을 잘 수행하도록 촉진하고 도와주며 상호작용하는 촉진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3)
학생들의 학습권 실현은 국가가 학습자의 학습권을 실현할 수 있는 학습 환경과 기회를 세심하게 설계하여 제공하는 것이 기본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 바탕에서 학교와 교사는 학생들이 학습을 잘 수행하도록 촉진하고 도와주며 상호작용을 하는 역할을 수행할 때 학습자의 학습권 실현은 비로소 가능하다.
이상만이 현실을 바꿀 힘을 갖고,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이상만이 현실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가 한 말이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고 한다.
이 말이 시사하는 바는 현재의 고교학점제와 관련해, 고교학점제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자 지금의 교육 현실을 바꿀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현실화시킬 수 있는 구체적이고 세심한 준비가 없다면 ‘악마로 작용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새 정부는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옛 속담의 지혜를 되새기며,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회적 공론화 과정을 차례대로 거쳐 교교학점제 도입 취지대로 교육대전환을 이룰 수 있는 교육정책을 펴나가길 고대한다.
1)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이대로 괜찮은가?https://www.koreateachers.org/news/articleView.html?idxno=2433. (실천 교사 모임, 2024.2.15.) 2) 「지역사회협력 청소년 자치배움터의 학습과 실천에 대한 의미 분석:학습자 배움중심교육과 학습권 실현 조건 탐색을 중심으로」(홍제남, 2019) 3) 상동 |

홍제남 = 강원도의 농부 집안에서 7녀 1남 중 3녀로 태어났다. 춘천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지구과학교육과에 진학했으나 광주학살을 접하고 교육에 배신감을 느꼈고 학생운동에 뛰어 들었다. 이후 서울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했으며 2000년 마침내 과학교사로 임용된다.
2011년 서울 오류중학교에서 혁신부장을 맡아 혁신학교 시스템과 문화를 구축했으며, 2019년에는 오류중학교 공모교장이 된다. 2024년 2월 서울남부교육지원청 교육지원국장으로 명퇴하며 그는 “정치적 천민에서 탈출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이후 같은 해 8월 서울교육감 보궐선거에 예비후보로 등록, 민주진보진영 단일 후보 최종 경선까지 치렀으나 아쉽게 고배를 마셨다. 현재 '다같이배움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교육혁신을 주제로 한국교원대 대학원에서 석사를, 교육정책전문대학원에서 박사를 받았으며, 저서로는 과학 톡톡 카페(공저, 2009),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학교혁명(공저, 2018), 교장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2024) 등이 있다.
홍제남 소장은 <더에듀> 연재를 결심하며 “교육자로서 24년의 시간을 보내며 학생, 동료교사와 많은 일들을 함께 했다"며 ”이 중 ‘교육다운 교육’, ‘진짜 교육’을 만드는 일을 학교 차원에서 집단지성으로 실천한 혁신학교 실천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학생, 교사, 보호자, 지역사회가 온전한 교육 주체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하며 실천했다"고 평했다.
또 “과학교사, 교장, 장학관, 연구자로 현장에 뿌리내리고 실천하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며 “이 과정에서 교육자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은 교육이 교육의 논리가 아닌 신자유주의적 정치적 이해집단의 논리에 따라 좌지우지된다는 점”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백년지대계인 교육은 학생들이 학교에 머무는 짧은 몇 년의 모습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장기적 과제”라며 “교육의 지향과 목적,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회가 교육을 위해 해야 할 일, 그 결과로 학생들은 교육을 통해 성취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과 고민을 나누며 같이 길을 찾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