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샘의 천년고도 역사문화 기행] 현종과 양귀비의 영원한 사랑 화청지(華淸池)

  • 등록 2025.11.18 11: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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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에듀 | 당나라 수도였던 시안을 모델 삼아 만들었다는 계획 도시 경주와 일본의 교토, 동아시아 3개 나라의 천년고도 시안, 경주, 교토를 방문하며 보고 공부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록에 근거한 역사 문화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기회로 직접 경험한 내용들을 복기하면서 불분명함이 명확해지고 새로워지는 경험을 해보고자 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 중 -

 

진시황릉, 병마용, 화청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세 장소가 모두 근처에 있어 함께 가는 경우가 많다.

 

화청지(華淸池/화청궁)는 왕조의 영화와 한 여인의 비극적인 아름다움과 격동의 근현대사를 모두 품고 있는 특별한 장소이다. 여러 왕조 중에서 특히 당나라는 화려했던 중국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으며 중국인들 또한 그 시대의 영화를 자랑스러워 하고 그리워한다.

 

현종과 양귀비의 영원한 사랑의 장소인 화청지(華淸池)는 시안 시내에서 30km 떨어진 여산(骊山) 일대에 위치한다. 이곳은 중국에서 교육기관(학교)과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화청지는 3000년 전 주나라 때부터 당나라 때까지 황제와 조정 대신들이 애용했던 온천이자, 당나라 6대 왕이었던 현종과 며느리였던 양귀비의 로맨스 무대로 유명하다.

 

747년에 현종은 온천을 좋아하는 양귀비를 위해서 이곳에 대규모 공사를 실시, 온천 뿐 아니라 궁전을 새롭게 짓고 궁전 주변을 성벽으로 둘러싸 ‘화청궁(华清宫)’을 완성했다.

 

양귀비는 서시, 왕소군, 초선과 함께 중국의 4대 미인으로 유명하다. 아들의 부인으로 35살이나 연하인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뒤로 했기에 중국 역사상 둘도 없는 전성기였던 당나라가 멸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화청지에 입장하면 뒤로 산이 보이고 그 앞에 건물들과 함께 연못이 있다. 이 연못 위에 세워진 무대에서 장안가 공연이 펼쳐진다.

 

 

연못 주위를 돌아 올라가면 온천을 하는 여러 건물이 등장한다. 매일 43℃의 온천수가 120톤씩 샘솟는다는 화청지에서 양귀비는 온천을 즐기며 매끄러운 피부를 항상 유지했다고 한다.

 

당시 현종과 양 귀비가 사용하던 온천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연화탕’은 현종이, ‘해당탕’은 양귀비가, 그보다 먼저 만들어진 ‘성진탕’은 고구려 정벌로 대패를 했다는 태종 이세민이 애용했다.

 

왕이 사용하던 온천 유적 오른쪽에 주룽호라는 호수가 있다. 푸른 물 위로 호숫가 풍경이 비친다. 사이사이로 당나라풍 정자와 회랑이 이어진다. 양귀비의 백색 석상이 있는데 이곳이 사람들이 촬영을 많이 하는 스팟이다.

 

북쪽에 있는 비상전은 밤낮으로 미모를 가꾼 양귀비가 현종을 침실로 이끌었던 둘만의 처소다.

 

해당탕은 양귀비가 홀로 목욕했던 개인 탕으로, 탕의 형태가 마치 만개한 해당화 꽃잎을 닮았다. 현종이 양귀비의 미모에 취해 그에게 헌사한 특별한 공간이다. 현종의 ‘연화탕’은 연꽃 모양을 본떴으며, 그 규모가 해당탕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다. 이 탕에서는 발굴된 물길 유적을 통해 당시 온천수 공급 시스템의 정교함을 엿볼 수 있다.

 

‘향기가 엉긴 연못’이라는 뜻의 향응지와 학문을 닦던 누각인 수문당 등은 현종이 정무를 보거나 연회를 즐겼던 부속 건물들이다. 온천고원은 화청지 온천수의 원천이 나오는 곳이다.

 

화청지가 유명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중국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침략을 받았다. 큰 땅과 많은 인구 그리고 우수한 문명을 가진 중국 대륙이었지만, 근대에 이르러 청나라의 몰락과 함께 종이 호랑이로 전락하면서 외세의 침략을 받기 시작했다.

 

쑨원의 중화민국이 등장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나라 안이 어수선한 틈을 타 일본이 만주지역을 침략했다. 그러나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집중했다. 부하 장군 장쉐량은 먼저 외국세력인 일본과의 항일 전쟁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화청지를 방문했던 장제스를 억류하기로 결심했다.

 

이 사건이 바로 시안사변이다. 궁궐 일부 건물 창문에는 시안 사변 당시의 총알 자국이 유리창에 그대로 남아 있어, 고요한 궁궐 속에 숨겨진 역사의 긴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겨울 총성이 울리자 장제스는 급박하게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 궁궐 뒤편 여산으로 필사적으로 도망갔다. 추운 겨울,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바위 틈 사이에 숨어 있던 장제스는 결국 체포돼 구금됐다. 장제스가 숨어 있다가 체포되었던 바위 위에는 후일 ‘병간정’이 세워져 역사의 현장임을 알리고 있다.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함께 국공합작을 통해서 일본과의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이 사건이 없었다면 국민당은 유리한 상황 속에서 중국 대륙을 통일했을 것이고, 타이완 섬으로 밀려나지 않았을 것이다. 공산당 입장에서는 소멸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상황에서 기사회생해 대륙을 갖는 계기가 된 셈이다. 그래서 중국과 타이완이 시안사변을 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대륙을 포기하고 타이완 섬으로 옮긴 장제스는 죽을 때까지 대륙수복의 꿈을 그리면서 시안사변의 주인공인 장쉐량을 타이완 섬 곳곳에 연금시켰다고 한다. 어쩌면 시안사변이 우리의 역사에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김현진 인천 첨단초 교사 te@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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