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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쌤의 천년고도 역사문화 기행] ⑦진시황제의 호위병사 병마용

더에듀 | 당나라 수도였던 시안을 모델 삼아 만들었다는 계획 도시 경주와 일본의 교토, 동아시아 3개 나라의 천년고도 시안, 경주, 교토를 방문하며 보고 공부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록에 근거한 역사 문화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기회로 직접 경험한 내용들을 복기하면서 불분명함이 명확해지고 새로워지는 경험을 해보고자 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유홍준 나의 문화 유산답사기 중 -

 

550여 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왕조를 이룬 진(秦)나라의 왕으로,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한 진시황제! 죽어서도 영원하고 싶었던 그는 커다란 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 여러 장치를 만들어 후대가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진시황릉을 완공한 후 약 1세기가 지난 때 저술한 역사서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진시황이 340만 명 인부를 동원하여 기원전 246년에 건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진시황릉은 지상의 황궁을 그대로 옮긴 것과 같은 규모이며, 수은이 흐르는 5000여 개 강과 수십 개 망루를 가진 성 안에 온갖 보물과 병사로 화려하게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진시황릉은 지상 궁전을 재현한다는 개념으로 지었다. 높이 76미터, 넓이 350평방미터에 이르는 흙으로 조성된 거대한 피라미드로 완공한 후 도굴을 막고자 동원했던 인부들을 모두 사살하였다고 한다. 진시황릉에 대한 발굴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003년 1월 9일 진시황릉의 부장릉이 발견되어 진시황릉이 병마용뿐만 아니라 실제 황궁을 재현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병마용갱 부근 산의 토양에는 많은 수은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이곳이 바로 진시황릉이 조성된 곳으로 추정된다.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가 우연히 발견한 병마용은 전 세계 사람들은 깜짝 놀라게 하였다. 과거 역사 속이나 영화에서나 등장 했을 만한 것들이 현실 세계로 나왔기 때문이다.

 

병마용이 묻혀 있던 갱은 진시황릉에 딸린 갱의 일부로, 흙으로 구운 병마용이 대량 출토되었다. 병마용은 진시황이 죽은 후 세계를 지키는 병사들이었다. 완성된 토용은 계급과 역할에 맞춰서 당시 진나라 군사 대형을 정확하게 따른 형태로 구덩이 속에 배치되었다.

 

병용은 일반 사람들보다 키가 큰 편인데, 장군을 병사보다 크게 만들었다. 병마용은 무장을 한 보병, 전차병, 기병, 말, 장교 등 다양한 병과 군인들을 표현했다. 얼굴은 약 8가지 복제 틀을 사용해 제작했는데, 기본형에 수염 등 세부적인 변형을 가해 하나하나가 전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발굴된 갱도 4곳 중 3곳에 모두 병용 8천여 점, 전차 130기, 말 520점이 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발굴된 것보다 더 많은 수가 아직 흙 속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토용 이외에도 마차, 말, 학, 자이언트 판다 등 진기한 동물 수십 마리, 부식되지 않도록 돌 조각을 엮어 만든 실물 크기 갑옷과 투구 등이 현재까지 발굴되었다.

 

가장 먼저 발굴된 1호 갱에만 6000점의 병마용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중 완벽하게 복원을 마친 1050여 점의 병사가 발견 당시의 대형으로 서 있다.

 

2년 뒤인 1976년에 2호와 3호 갱이 추가로 발견되면서 병마용 갱은 중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1호 갱에서 발굴된 병마용이 가장 많고 웅장하다. 제1호 갱은 면적이 1만 4260㎡나 되어서 아치식으로 지붕이 덮혀 있는 거대한 경기장을 방불케 한다.

 

1050명의 병사와 24마리 말이 네 집단으로 나뉘어 있다. 맨 앞에 210여 점의 테라코타 병사들이 전위 부대를 형성하고, 그 바로 뒤에 11개 집단으로 나뉜 38열의 병사들은 보병과 마차나 말을 끌던 차부다. 병사들은 대부분 갑옷 차림으로 한 손에 무기를 쥔 자세인데, 실제로 대량의 청동 검과 창촉이 병사들 발밑에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나무로 만든 손잡이 부분이 썩어 없어지면서 바닥에 흩어진 것이다.

 

1호 갱 지하에는 아직 발굴하지 않은 병마용 5000여 점이 잠들어 있다. 원래 병마용은 발굴 당시에 머리는 검은색, 얼굴은 연한 황색, 갑옷은 청색 등으로 채색된 상태였는데, 공기 중에 노출되면서 색상이 날아가 버렸다. 1호 갱의 뒤쪽에는 부서진 채로 발굴된 병사들을 보수하는 작업들이 이어지고 있다.

 

 

2호 갱의 병사들의 움직임이 3개의 갱 중 가장 활동적이다. 기병은 안장과 고삐를 갖춘 말을 몰고, 한쪽 무릎을 꿇은 궁수가 전방에 포진했다. 전차는 오른쪽 측면에, 기병은 왼편을 맡았다. 중앙에는 보병이 직사각형 대형으로 분산돼 있다. 3개의 갱에서 발굴된 병사들과 청동 전차 및 무기를 전시해 놓은 문물 전시관이 있다. 1980년에 진시황릉 묘역 부근의 봉분에서 발굴한 청동 마차 2량이 있다.

 

3호 갱은 3개의 갱 중에서 규모가 520㎡로 가장 작다. 병사들의 지휘 본부로 추정되는 제3호 갱에서는 4마리 말이 끄는 전차 한 대와 68명의 병사가 출토되었다. 장교 병마용의 옷차림은 일반 병사와 약간 다르다.

 

 

중국에 있는 재외한국학교에 근무하면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장소가 시안의 병마용이었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듯한 역사의 현장이 커다랗게 눈앞에 펼쳐지니 그 감흥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이다.

 

중국의 어느 곳을 방문할 때마다 느낀 점은 무엇을 만들든 참 크게도 짓는다는 것, 방문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문화유적지의 입장료가 비싸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방문하는 사람이 근래 들어 더 많아졌다는 점과 박물관 굿즈가 외국인에게도 인기가 많다고 한다. 거기에 따라 박물관 입장료를 받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방문하고 보고 듣고 느끼는 감흥은 입장료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이 든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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