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현장체험학습을 두고 이재명 대통령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면 안 된다”는 발언에 교직사회의 큰 반발이 있었다. 뒤이어 ‘학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다시 묻고 답할 때’라는 학부모단체의 환영 논평과, ‘미비한 제도를 지적하면서 정작 본질을 회피하고 있지 않은가, 무리한 민원을 다룰 힘과 권위가 상실된 상황을 교사들이 자초한 것은 아닌가’ 하는 모 교수의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나쁜 취지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겠으나 의미 있는 사회적 논의로 발전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현장체험학습 필요성의 근거는 ‘학생들이 좋아하고 원한다, 추억을 쌓는다, 새로운 경험을 해 본다’ 정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이 오늘날의 교사들에게 ‘애들이 한 번씩 나가서 콧바람도 좀 쐬고’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나 또한, 교육에 대한 고민 없이 학습을 논하는 현 상황에서 도대체 이 사회가 현장체험학습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고 배우게 하고 싶은 것인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 학습이라기보다 여가에 가까운 활동에서 사고라도 나면 직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책임소지를 면하기 위해 해야 하는
더에듀 | 대한민국은 현 정부가 들어선 후 ‘AI 3대 강국’을 국가적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대통령조차 “하루가 늦으면 한 세대가 늦춰진다”고 강조하며, 정부 부처와 기업들도 한목소리로 인공지능 경쟁력을 말한다. 반도체와 플랫폼, 데이터센터와 GPU 확보 전략도 쏟아진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질문은 던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누가 AI를 만들고, 누가 AI 시대를 이끌 것인가?’ 일선 학교 현장은 AI를 가르칠 교사가 부족하여 상치교사로 운영되고 한 학교 소속의 정보 교사는 여러 학교를 순회하며 가르치는 형국이다. 이로써 우리는 국가 경쟁력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을 키우는 곳은 대학임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대학은 미래로 가려는 발목을 여전히 과거의 교육제도가 붙잡고 있다. 교육부는 이에 앞장서 낡은 제도의 혁파에 무능의 소치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 서울대가 자유전공학부에 100명 규모의 ‘융합AI광역’ 모집 단위를 신설하려 했지만 교육부가 반려했다는 소식은 단순한 행정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고등교육이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서울대의
더에듀 |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변화는 단순히 ‘권리구제 확대’나 ‘민주주의의 진전’이라는 한 문장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에 이르렀다. 오히려 교육 현장을 오래 경험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국가 시스템 전체가 학교가 무너져 온 방식과 놀라울 만큼 닮은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강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변모하는 학교의 기능...교육기관에서 분쟁 처리 기관으로 학교는 원래 교육기관이었다. 교사는 학생을 가르치고 성장시키는 전문직이었다. 생활지도는 교육적 판단의 영역이었고, 갈등 해결 역시 교육적 맥락 안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과거의 학교 역시 완전하지 않았다. 폐쇄성과 권한 남용의 문제도 존재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통제와 권리구제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학교는 점점 교육기관이 아니라 ‘분쟁 처리 기관’처럼 재설계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학교의 기능은 교육을 넘어 돌봄과 복지까지 함께 수행하는 생활 행정기관으로 확장됐다. 교육활동은 생활지도 분쟁으로, 생활지도는 민원으로, 민원은 행정 절차로, 절차는 다시 준사법 구조로 변해갔다. 교사의 판단은 교육적 전문성보다 “절차적으로 안전한가”로 평가되기 시작했고, 학교는 교육의 공
더에듀 | 매년 5월, 어린이날을 맞이하거나 보내면서 우리는 복잡한 생각에 잠긴다. ‘과연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은 어디에 서 있는가?’ 세계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의 교육열에 의해 겉으로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학업 성취를 자랑하지만, 그 이면에는 조기 선행학습과 경쟁 체제로의 진입,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정서적 방치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이른바 ‘4세 고시’, ‘7세 고시’, ‘영어 유치원’이라는 말이 일상처럼 통용되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놀이보다 평가를 먼저 배우고, 호기심보다 배움에 대한 불안과 스트레스를 먼저 체득한다. 이는 단순히 교육 문제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동의 존엄과 권리에 관한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1920년대,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선언했던 소파 방정환 선생의 어린이 존중 사상을 오늘날 다시 소환해야 한다. 그는 어린이를 억압과 훈육의 대상이 아닌 사랑과 존중의 주체로 바라보며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아 주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과연 아이들을 ‘쳐다보고’ 있는가? 아니면 ‘밀어붙이고’ 있는가? 우리의 어린이 사랑이라는 온갖 화려한 포장이나 구호의 이면에 실제로는 어린이 학대에 가까운
더에듀 | 5월이다. 광주의 교육자에게 5월은 추모의 시간이자 교육의 시간이다. 교직 40년을 바라보는 지금,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흔들리는 장면 앞에서 침묵하기 어렵다. 5·18을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학생들에게 권력이 어디까지 허용되고, 어디서부터 제한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선거에서 이긴 권력이 마음대로 행사되는 체제가 아니라, 권력이 법 아래에서 제한되고 서로 견제되도록 만든 헌정질서다. 광주의 5·18은 바로 그 원칙이 무너졌을 때 시민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 민주주의의 가장 아픈 기억이다. 공소취소로 이어질 수 있는 조작기소 특검법, 법치주의 위협할 것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하나 있다. ‘권력자는 자기 사건의 법 절차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는가.’ 대통령과 관련된 형사재판을 대통령이 임명한 특검이 넘겨받고, 그 특검이 공소유지 여부까지 판단할 수 있다면, 그 답은 명백히 아니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 공방의 문제가 아니다. 학생들에게 법치와 권력분립을 가르쳐 온 교육의 언어가 현실 정치권력 앞에서 무너질 수 있는 문제다. 최근 논란이 된 이른바 ‘조작기소 특
더에듀 | 제104회 어린이날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인공지능(AI)이 일상생활이 된 초연결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적 화두는 명확합니다. 바로 ‘자신만의 고유한 역량 신장’과 ‘타인과 함께 성장하는 공존의 지혜’입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님께서 어린이날을 선포하며 강조하셨던 정신은 아이들을 소중한 인격체로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 정신은 아이들이 각자의 재능을 발견하고 실력을 키워나가는 ‘자기 주도적 역량 강화’로 계승되어야 합니다. 최근 광화문을 뜨겁게 달구었던 BTS의 무대는 철저한 자기 노력이 있었기에 전 세계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 역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고, 자신만의 강점을 극대화하여 세계를 무대로 활약할 글로벌 인재로 거듭나야 합니다. 하지만 뛰어난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복잡한 미래 사회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AI 시대의 리더십은 ‘나’를 넘어 ‘우리’로 확장될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초연결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타인과 소통하고 협업하며,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공존의 역량’이 필수적입니다. 친구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협업의 과정이야말로, 아이들이 사회적 자아로
더에듀 | 제104주년을 맞이한 어린이날입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비전이 있고, 더 희망이 있는 존재”라며 이 땅의 아이들에게 존엄과 행복을 선물한 지 벌써 한 세기가 넘었습니다. 하지만 학교 현장을 지키는 한 명의 교육자로서, 그리고 교육계의 흐름을 지켜보는 한 사람으로서 저는 오늘 무거운 고백을 하나 하려 합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최근 언론을 통해 들려오는 교육계의 소식들을 접하며 맞이하는 어린이날은 마냥 축하하기엔 너무도 ‘서글픈 역설’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소음 측정기를 든 이웃, 사라져가는 아이들의 함성 제가 교직에 처음 몸담았던 시절, 어린이날 전후의 학교는 온 동네가 잔칫집이었습니다. 만국기가 하늘거리고 아이들의 응원 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지나가던 어른들도 잠시 멈춰 서서 흐뭇하게 웃으시곤 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내지르는 건강한 생명력의 신호였고, 공동체가 함께 아이를 키운다는 무언의 약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보도되는 일선 학교들의 풍경은 너무나 차갑기만 합니다. 학교 인근 주민들에게 아이들의 활기찬 함성은 더 이상 ‘희망의 소리’가 아닌, 층간소음보다 무서운 ‘생활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합니
더에듀 | 매년 5월 5일이면 거리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난다. 부모들은 정성껏 준비한 선물과 나들이로 아이들의 기분을 맞춘다. 하지만 딱 하루일 뿐, 우리 어린이들의 평소 일상은 그리 밝지 못하다. 자녀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시대보다 높지만 부모들의 불안 또한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아이들이 독립적인 개체가 아니라 부모의 소유물이거나 부속물처럼 취급받고 있지 않은지 깊고 냉철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올해로 104회를 맞이한 어린이날, 우리는 다시금 이 날의 유래와 소파 방정환 선생이 외쳤던 근본적인 정신을 되새겨봐야 한다. ‘어린이’라는 이름에 담긴 존엄의 무게 1923년, 소파 방정환 선생을 비롯한 선구자들은 ‘어린이날’을 선포하며 세계 최초의 어린이 인권 선언이라 평가받는 ‘어린이날 선언문’을 발표했다. 당시 아이들은 그저 ‘애’나 ‘어린 것’으로 불리며 어른의 부속물처럼 여겨졌으나, 소파 선생은 ‘어린이’라는 존칭을 만들어 이들이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존재임을 천명했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봐 주시오”라는 그의 호소는, 아이들이 어른과 대등한 인격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권의 선언이었다.1) 2026년, 어린이들이 보내는 구조
더에듀 | 아이가 아침부터 학교에 가기 싫다고 울고불고 난리다. 이를 측은하게 여긴 부모는 담임교사와 학교장 때문이라며 그들을 싸잡아 비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학교에 민원을 넣어 왜 우리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은 것이냐고 질책을 한다. 그렇다면 담임교사와 학교장은 “네, 네. 제 탓입니다.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고 가슴을 세 번 치며 사제 앞에서 고회 성사를 하듯이 죄의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인가? 한 젊은이가 “엄마, 오늘 학교에 가기 싫어요”라고 말하자 그 어머니는 “얘야, 너는 학교 선생이잖니?”라고 말한다면 그 젊은이는 철딱서니 없이 응석받이 노릇을 하며 부모를 근심케 하는 불효자식인가? 이는 오늘의 우리 학교의 실상에 관한 비유적 사례를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이 글의 서두에서 이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 대통령의 발언, 특히 학교 체험학습과 소풍을 실시하지 않는 학교들에 대해 “구더기 무서워 장독대를 깨뜨린다”는 식의 비유를 통해 교사와 학교를 질책하는 듯한 모습이 전국적으로 뉴스를 통해 전해졌다. 교육 현안을 바라보는 대통령 인식의 단면을 드러낸다. 문제의 본질을 지극히 단순화하는 동시에, 교육 현장의 복합성과 맥락을 전혀 이해
더에듀 | “한국에 올 때는 꿈을 꾸며 왔지만, 돌아갈 때는 관 속에서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최근 지상파 방송을 타고 전국적으로 전해진 뉴스에 등장한 이주 노동자 권리 구제 집회에서 울려 퍼진 이 절규는 2026년 대한민국이 마주한 가장 부끄러운 민낯이다. 지난 5월 1일 노동절을 법정 공휴일로 맞이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나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곳에서 이 나라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인식 개선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전 세계가 K-컬처의 화려함에 열광하고, 우리가 선진국 반열에 올랐음을 자부하는 사이, 우리 경제의 하부 구조를 지탱하는 이주 노동자들은 ‘현대판 노예제’라 불리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음과 맞바꾼 노동을 이어가고 있다. 이주 노동자의 인권 문제는 이제 시혜적 차원의 복지를 넘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존립 근거와 품격을 결정짓는 법적·제도적 생존권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2020년 12월, 경기도 포천의 한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추위를 견디다 못해 사망한 캄보디아 이주 노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