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교사 이야기] 무서운 교사에 대하여

  • 등록 2025.12.09 11:2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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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며 단호한 초등학생생활지도, 어떻게 해야 하나②

더에듀 | 실천교육교사모임은 현장교사들을 주축으로 현장에서 겪는 다양한 교육 문제들을 던져왔다. 이들의 시선에 현재 교육은 어떠한 한계와 가능성을 품고 있을까? 때론 따뜻하게 때론 차갑게 교육현장을 바라보는 실천교육교사모임의 시선을 연재한다.

 

 

교사들은 엄하고 무섭습니다. 요즘은 선생님들이 너무 친절해서 문제 아니냐고요? 그 또한 맞습니다. 너무 친절하거나, 친절하기‘만’ 한 건 분명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 전 글(‘친구 같은 교사라는 환상에서 벗어나기’에서 충분히 다뤘으니 넘어가도록 할게요.

 

그런데 정말 학교에는 친절한 선생님이 넘쳐날까요?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교권 사태는 정말 선생님들의 친절함 때문에 일어난 일일까요?

 

제가 직접 보고 느낀 바로 학교에는 두 부류의 교사가 공존합니다. 무서운 선생님과 친절한 선생님 모두 있습니다. 학교마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절반 정도는 무섭고 절반 정도는 친절합니다. 물론 무서운 선생님도 때로 친절하고, 친절한 선생님도 때로 무서울 때도 있어서 칼로 무 자르듯 딱 나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어떤 성향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과거에 비해 친절한 선생님이 많아진 건 맞습니다. 요새 사람들 심성이 갑자기 여리고 착해져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학생 인권과 학부모 민원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가 작용했을 겁니다.

 

친절한 선생님이 과거보다 많아진 건 좋은 일일까요? 긍정적인 측면이 없진 않지만 상황에 맞지 않는 친절함은 독입니다. 고로 친절한 선생님 자체가 언제나 선이고 옳은 방향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무서운 선생님


과거에는 온통 무서운 선생님 천지였습니다. 체벌이 난무하던 시절에는 더 말할 것도 없겠지요. 그 무서운 교사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집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어렸을 때 무서운 교사 밑에서 배운 경험이 많기 때문에 그런 모습에 익숙하고 그 모습은 어느새 내 모습이 됩니다.

 

무섭게 하는 건 아이에게 괜찮을까요? 아이가 잘못을 했다면 무섭게 하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언제나 친절하고 부드러운 사람만 만나지는 않을 터입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 이렇게 무섭게 혼나기도 하는구나’ 하는 걸 때로 느끼기도 하며 견디기도 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문제는, 매사 무섭게‘만’ 하거나 너무 과도하게 무섭게 하는 경우입니다. 무섭게만 했을 경우 ‘통제’는 비교적 쉬울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사소한 행동과 잘못에도 무섭게 반응한다면 아이들은 선생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선생님 눈치를 보고 한껏 움츠러듭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매사 무섭게 하는 게 나빠 보입니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아이들은 크게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고 서로 간의 다툼도 많지 않습니다. 매번 통제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고로 안전상 사고도 많지 않고 학폭 사태도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잘만 한다면 아이들이 교사에게 ‘개길 일’도 없습니다. 엄한 규율이 지배하는 군대에서 총기와 무기류를 다룸에도 큰 사건사고 없이 관리되는 것과 같습니다.

 

안전사고와 학폭, 교사에 대한 반항이 현저히 줄어든다는 점에서, 무서운 교사는 아주 큰 이점이 있고 교사들이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무서움과 엄함만이 지배하는 교실은 군대와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교육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교육의 목표가 ‘통제’와 ‘순응’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그래도 상관없지만 군사정권 시절에는 어떨지 몰라도 지금 교육의 목표는 그게 아닌 건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는 걸 그 목적으로 합니다.

 

저는 지금 ‘통제’와 ‘순응’이라는 목표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특정한 상황에서, 그러니까 군대, 전쟁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그 목표가 정당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교육이라는 걸 행하는 교실에서 ‘통제’와 ‘순응’ 자체를 목표로 삼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때로 몇몇 교사들은 ‘통제’하고 ‘순응’시키는 데 몰입해 그것 자체가 교육의 목표인 양 아이들을 대하기도 합니다.

 


화내는 교사, 그 부작용에 대하여


교사의 무서움에 꼭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화내고 혼내는 것이지요. 어떤 분들은 화내는 것과 혼내는 것을 구별하기도 하는데, 저는 그 둘이 어떻게 크게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둘은 사실상 붙어 다닙니다. 혼낸다는 건 보통 화내면서 아이를 다그치는 걸 의미하니까요.

 

무섭게 하는 것, 즉 화내는 것에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습니다.

 

첫째, 아이의 자아존중감이 떨어집니다. 즉,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모두 존중받아야 합니다. 피부색이 달라도, 장애가 있어도 모두 존중받아야 합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잘못을 저질렀어도 존중받아야 하냐고요? 네, 맞습니다. 잘못을 저질렀어도 기본적으로 그 아이 자체는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동의 못 하는 분도 있겠지요.

 

예컨대, 범죄자에게도 인권을 보장해야 하냐는 질문이 연관되어 떠오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범죄자도 기본적인 인권은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찰도, 검사도, 판사도 범죄자를 앞에 두고 때리거나 화내지 않습니다. 다만 범죄자의 잘못을 법에 의거해 밝히고 그에 따른 책임으로 물리적인 제지와 구속을 할 뿐입니다. 공적으로 그에게 물리적 폭력을 가할 수 없고, 화내거나 다그쳐 그 인격을 훼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책임을 지게 할 뿐입니다.

 

제가 얘기하는 ‘인권’과 ‘존중’이라는 건 딱 그 정도 수준입니다. 아이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잘못한 것에 대해 알게 하고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교사가 화를 내고 다그치면서 아이의 자아존중감을 떨어뜨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둘째, 아이가 상처를 받습니다.

 

자아존중감이 떨어지면서 아이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 상처가 자기 성장의 밑거름으로 작용하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상처는 자기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때로 다른 사람에게 공격적인 행동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셋째, 아이가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습니다. 물론 진정으로 반성하고 다시 안 그러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좀 더 솔직해집시다. 과거에 내가 부모님이나 선생님한테 혼났을 때 진정으로 반성한 경험이 더 많았나요, 아니면 그저 억울하고 짜증만 난 경험이 더 많았나요? 저는 반성한 적이 없다고는 말 못 하지만 압도적으로 억울하고 짜증 난 적이 더 많았습니다.

 

교사가 화를 내는 방식의 다그침은 그 아이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말을 하더라도 모든 건 변명으로 치부됩니다. 본인이 실제 잘못이 있어도 아이는 억울해합니다. 그리고 반성하지 않습니다.

 

넷째, 별로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위에서 저는 무섭게 하면 아이들은 크게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고 서로 간의 다툼도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안전상 사고도 많지 않고 학폭 사태도 많이 일어나지 않으며 잘만 한다면 아이들이 교사에게 ‘개길 일’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말 잘했을 때 얘기입니다. 교사가 카리스마있게 무서움의 칼날은 잘 휘둘렀을 때 얘기입니다.

 

예전 권위주의 시절 교실에서나 체벌을 동반한 무서움이 잘 통했지, 지금은 정말 잘 해야 통합니다. 자칫 잘못 무섭게 했다가 아동학대 신고를 당하는 건 차치하더라도, 이런 방식은 아이들에게 엄청 잘 통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엇나가는 아이라도 생기면, 교사에게 반항적으로 나오는 건 예삿일도 아닙니다.

 

다섯째, 별로 교육적이지 않습니다.

 

교사가 화를 내며 무섭게 하는 방식을 아이들도 닮습니다. 다른 친구와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자기가 옳다며 화를 내는 방식으로 해결합니다.

 

교사가 잘못을 한 아이에게 화를 내는 방식으로 다그친다면, 그 아이는 똑같이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에게 화를 내는 방식으로 다그칠 겁니다. 다그침을 받은 아이도 똑같이 자기가 억울하다고 생각할 테니 그 아이도 화가 나서 상대방 아이를 다그칠 겁니다. 곧 싸움이 일어나는 건 보지 않아도 뻔하죠.

 

또 무서운 선생님 앞에서는 아이들이 말을 잘 듣고 순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는 선생님(친구같은 선생님, 착하기만 한 선생님)을 만나면 이리떼처럼 물어뜯기도 합니다.

 

학교 현장에서 (초등의 경우) 담임 말은 잘 듣지만 전담 선생님에게 함부로 하는 아이들을 많이 보셨을 겁니다. 그런 반 아이들 중 담임 선생님이 엄하고 무서운 경우가 꽤 자주 있습니다.

 


무서운 교사에서 벗어나기


지금 제가 하는 말이 다소 한가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이 엄혹한 시절에, 망나니 같은 아이들을 잡으려면 무섭게 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마음은 망나니 같은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참교육을 시키고 싶은 마음과 통합니다. 저 또한 그런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자면, 망나니 같은 아이들과 학부모가 많아진 것도 사실이고, 그들에게 우리가 큰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교사에게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두 사례가 학교에는 공존합니다. 우리가 받은 피해만 생각하고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관행, 습관들을 성찰하지 않는다면, 교권을 향한 우리의 정당성은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더 튼튼한 교권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가르치는 방식에 대해 돌아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권위주의 시대에 권위적인 교사들과 그 방식을 답습한 교사들 밑에서 자랐고, 그 영향으로 여전히 무섭게 가르치는 방식은 학교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교사양성기관에서는 학생생활지도법이나 훈육법, 학급운영에 대해 가르치지 않고 교사들은 그와 관련한 고민을 깊게 하지 않은 상태에서 현장에 투입됩니다. 특히 학생지도 방법은 전적으로 교사 개인의 경험에 의존합니다. 교사 개인이 아이들과 부딪치면서 효과적이고 교육적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해 적용하고 아니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수정해 가며 다시 적용합니다. 그 결과 자신만의 방식을 완성해 갑니다.

 

무수한 시행착오와 경험은 분명 소중한 경험이기는 하지만 때로 그 경험의 굴레에 갇혀 더 큰 눈으로 전체를 보지 못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학교 현장은 우리만큼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며 때로 바깥의 말에 눈과 귀를 닫기도 합니다.

 

무섭게 하는 방식이 무조건 잘못됐다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의 잘못과 문제행동을 그냥 넘기자는 말도 아닙니다. 잘못된 행동은 당연히 책임지게 해야지요. 다만 무섭게 하는 방식 말고 더 나은 방식은 없는지 끊임없이 공부하고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대에 교사를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혹여나 제가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학생인권근본주의자’들처럼 보일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용기 내어 써 봅니다. 저를 포함해 교사들이 무섭게 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으로요.

 

그럼 무섭게 하는 방식 말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다른 방식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요? 다음 번에 또 얘기할 기회가 있겠죠. ‘친절하며 단호한 초등학생생활지도, 어떻게 해야 하나’ 두 번째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계속>

곽노근 경기 문산초 교사/ 실천교육교사모임 정책지원팀 te@t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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