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요즘 교육 현장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 있다. “그럴 수도 있지.” 아이가 실수를 해도, 친구를 괴롭혀도, 심지어 교사에게 무례한 행동을 해도 이 말은 손쉽게 따라붙는다. “아직 어려서 그래요.” “요즘 아이들은 다 그렇죠.” 겉으로는 이해와 배려 같지만, 어느 순간 아이를 향한 방임으로 미끄러지곤 한다. 공감은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따뜻한 태도이다. 하지만 방임은 아이의 행동을 그냥 흘려보내는 태도이다. 둘은 결코 같은 이름을 가질 수 없다. 공감이 교육의 출발이라면, 훈육은 교육의 마침표이다. 공감만 있고 훈육이 없다면 아이에게 남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무한한 자기중심성이다. “그럴 수도 있지”가 아무런 점검 없이 반복될 때, 아이들은 행동의 결과를 마주하지 않는다. 잘못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쳐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한다. 물론 공감이 꼭 필요한 순간이 있다. 넘어져 눈물을 삼키는 아이, 실수로 마음이 다친 아이, 혼자 외로움에 머무는 아이. 그 아이들에게는 따스한 마음을 건네는 일이 우선이다. 그러나 친구를 때린 아이, 규칙을 반복해서 깨는 아이, 수업을 방해하고 교사에게 말대꾸하는 아이에게 “그럴 수도 있지요”라는 말은 책임을 비껴가게
더에듀 | “너 어른한테 왜 그렇게 말하니?”, “선생님께 인사 좀 똑바로 해라.” 우리는 아이에게 존중을 요구하면서 정작 그 존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 때가 많다. 존중 교육의 출발점은 지시가 아니라 어른의 태도이다. 존중은 말로 전달되지 않는다. 시선과 말투, 아이의 이야기를 듣는 방식처럼 일상의 작은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다. 겉치레로 꾸밀 수 없고, 권위로 강요할 수도 없다. 진심이 빠진 예의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과 행동이 불일치할 때 가장 먼저 그 모순을 간파한다. 아이의 실수를 가볍게 넘기거나 “왜 그랬어!”, “또 너야?”라는 말로 다그치는 순간, 아이는 자신이 존중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크게 체감한다.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아이는 반항하거나 마음을 닫는다. 반대로 존중받는 아이는 생각하고, 이해하고, 스스로 변화를 받아들인다. 즉, 존중은 훈육의 전제다. 아이를 한 사람의 존재로 인정할 때 비로소 훈육은 효과를 가진다. 존중에는 순서가 없다. 나이가 많다고 먼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지위가 높다고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먼저 존중을 베푸는 사람에게 진정한 존
더에듀 | “참다 참다 화가 나서 그랬어요. 저도 사람인데 아이가 너무 말을 안 듣잖아요.” 이 말은 아이를 혼낸 뒤, 수많은 부모와 교사가 스스로를 변호하며 내뱉는 익숙한 문장이다. 그러나 그 훈육이 과연 ‘교육’이었는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 순간, 우리는 아이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아이에게 쏟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훈육은 감정을 푸는 일이 아니다. 그건 아이에게 책임을 전하는 일이다. 아이의 행동에 책임을 묻기 전에, 먼저 어른인 우리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너 때문에”가 아니라, “네가 어떤 선택을 했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한다. 화를 내는 건 쉽다. 그러나 가르치는 건 어렵다. 감정은 순간이지만, 가르침은 시간이 걸리고, 반복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그 차이를 모르면 우리는 매번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화를 내고, 그 자리에 상처와 후회를 남기게 된다. 훈육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잘못을 짚고, 옳음을 설명하며, 다시 기회를 주는 과정. 그 과정 안에 신뢰와 존중, 기다림과 인내가 깃들 때, 비로소 아이의 마음에 변화의 씨앗이 자란다. 아이를 혼낼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더에듀 |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왜 자꾸 말 안 들어?” 화를 내며 아이를 꾸짖던 부모가 전화벨이 울리자 순식간에 표정이 바뀐다. “아, 네~ 안녕하세요~” 그 순간, 아이는 본다. 말과 태도가 다른 어른의 모습을. 아이들은 말보다 모습을 기억한다. 교육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부모가 집에서 어떤 말투로 대화하는지, 약속을 지키는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그 모든 것이 아이의 ‘기본 태도’를 빚는다. 부모는 아이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교사이다. 말을 배우고, 표정을 익히고,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우는 첫 교실이 바로 가정이다. 그곳에서 배운 태도는 학교에서, 친구 사이에서, 그리고 사회 속에서 고스란히 반복된다. “우리 아이는 왜 인사를 안 할까요? 왜 자기 생각만 말하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을까요?” 그 질문에 앞서, 부모는 스스로를 비춰보아야 한다. - 나는 먼저 인사했는가? - 나는 상대의 말에 귀 기울였는가? - 불편한 상황에서 내 감정을 어떻게 다스렸는가? 아이는 듣기보다 흉내 내는 존재이다. 교사의 말보다 부모의 태도를 먼저 흡수한다. 그
더에듀 | 언제부터인가 교실은 ‘떠들어도 되는 곳’이 되었다. 교사는 ‘항상 참아야 하는 사람’이 되었고, 교육은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포장되었다.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질서는 흐트러지고, 교사의 권위는 사라졌다. 예전에는 교사가 들어서면 아이들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지금은 “조용히 하자”는 말에 “왜요?”, “꼭 조용해야 해요?”라는 반문이 돌아온다. 권위는 무너졌고, 품격은 지워졌다. 교사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 권위는 억압이나 폭력이 아니라, 지식과 인격, 태도와 신념에서 비롯된 존중의 힘이다. 아이들이 자라는 공간에는 중심이 필요하다. 그 중심이 흔들리면 배움은 사라지고, 공동체는 흩어진다. 교실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이 아니다. 태도를 배우고, 관계를 익히며,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곳이다. 이 신성한 공간이 존중받으려면, 먼저 그곳에 서 있는 교사가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학생을 지도하면 민원이 들어오고, 단호하면 불친절하다는 말을 듣는다. 꾸짖으면 아동학대를 걱정하고, 기준을 세우면 불통이라 말한다. 그래서 교사는 말을 아낀다. 가르치기를 망설이고, 훈육을 피한다. 그저 시간을 채우고, 갈등을 피하며, 자신을
더에듀 | 자유로운 교육이 이상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스스로 선택하게 하고, 자율적으로 생각하게 하며, 억압하지 않고 통제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보된 교육’의 이름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경계 없는 자유는 과연 진짜 자유일까? 요즘 아이들은 ‘자기 안의 욕구와 감정, 충동을 다스리는 법’보다 그것을 ‘표출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 기분이 나쁘면 소리를 지르고, 싫으면 자리를 박차고, 불편하면 말을 끊는다. 그리고 누군가 그 행동을 지적하면 이렇게 말한다. “내 감정이에요.” “표현의 자유잖아요.” “나답게 사는 거예요.” 하지만 아이가 배워야 할 건 ‘자기표현’보다 ‘자기조절’이다. 그 조절은 ‘경계’를 인식하는 능력에서 시작된다. 경계는 단순히 “하지 말라”는 금지선이 아니다. 여기까지가 나‘이’고, 저기부터 ‘타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존중이 시작된다. 경계가 사라지면 타인의 경계도 무시하게 된다. 결국 ‘내 마음대로 사는 삶’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삶’이 되고, 그런 아이는 사회 속에서 갈등을 만들며, 관계를 맺지 못하고, 외로움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경계를 가르치는 일, 그것이 훈육이다
더에듀 | 말은 칼처럼 날카롭고 빠르지만, 품격 있는 훈육은 바람처럼 부드럽고 깊게 스며든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를 꾸짖을 때, 종종 말보다 감정을 먼저 꺼내놓는다. “왜 말을 안 들어!” “너 때문에 미치겠어.” 이런 말은 교육이 아니라 감정의 분출이다. 아이는 잘못을 깨닫기보다 어른의 분노를 두려워하게 된다. 진짜 훈육은 다르다. “그건 잘못된 행동이야.” “지금 네가 한 말이 친구를 아프게 했단다.” “다시 한번 기회를 줄게. 이번엔 다르게 해 보자.” 이 말들은 아이를 비난하지 않는다. 행동을 바로잡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존중을 잃지 않으면서 기준을 세우는 것, 그것이 품격 있는 훈육이다. 말은 감정을 터뜨리는 통로가 아니라, 관계를 이어주는 다리여야 한다. 감정에 휩쓸린 말은 순간은 시원할지 몰라도,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다. 반대로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언어는 아이에게 경계와 신뢰를 동시에 준다. 그래서 아이는 “혼났다”는 기억보다 “사랑받았다”는 기억을 더 오래 품습니다. 교육은 결국 말로 완성된다. 그 말은 지시가 아니라, 존재를 일으키는 언어여야 한다. “다시 해 보자.” “괜찮아, 지금부터가 중요해.” “선생님은 네가 해낼 거라 믿
더에듀 | “선생님이 나를 보았어요.”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속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꾸중도, 칭찬도 아니었다. 그저 교사의 눈빛을 마주친 순간, 아이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꼈던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의 말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잊어버려도, 그 말을 건넬 때의 표정과 눈빛, 목소리의 떨림은 아이들의 마음속에 오래 남는다. 요즘 교실은 ‘말 많은 교실’이 되었다. 설명하고, 지시하고, 타이르고, 훈계한다. 그러나 아이는 말보다 그 말의 그림자를 읽는다. 입으로는 “괜찮아”라고 하지만 표정은 “실망했다”고 말하고, “기다려”라고 말하면서 눈빛은 “지겹다”고 속삭인다. 아이들은 그 모순을 정확히 느낀다. 그래서 교육은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았는 가’가 더 중요하다. 누구나 가장 따뜻했던 순간과 가장 서러웠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안에는 언제나 한 사람의 표정이 남아 있다.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준 선생님.” “무서운 얼굴로 끝까지 눈을 마주쳐준 선생님.” 그 표정 하나, 눈빛 하나가 말보다 깊은 흔적으로 남아 아이의 마음에 ‘자기 존재의 무게’를 심어준다. 교육은 결국 관계이다. 그리고 그 관계
더에듀 | 우리는 너무 빨리 결과를 원한다. 말을 배우면 금세 대화를 원하고, 글씨를 익히면 곧바로 글짓기를 기대한다. 훈육을 하면 다음 날부터 아이가 변하길 바란다. 하지만 교육은 기다림이다. 성장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아이들은 빠르게 자란다. 키가 크고, 말이 늘고, 손재주가 좋아진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마음은 느리게 자란다. 느리게 배우고, 천천히 받아들이며, 때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익힌다. 그런 아이에게 “왜 또 그랬니?”, “말했잖아”라는 말은 성장을 재촉하는 채찍이자, 아직 다치지 않은 마음에 찍히는 낙인이 된다. 교육이란 그 반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말해주는 일, 그 순간을 함께 견디는 일이다. 좋은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말을 아끼고, 판단을 유보하고, 아이가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사람. 그 기다림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그건 깨어 있는 침묵, 말 대신 마음으로 지켜보는 적극적인 인내다. 아이들은 아직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지금의 부족함이 평생을 결정하지 않는다. 지금은 어리광이 많아도 언젠가는 책임질 줄 알게 되고, 지금은 거칠어 보여도 언젠가는 누군가를 다정히 안을 줄
더에듀 |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세요.”, “아이의 감정을 억누르지 말아주세요.” 교육 현장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말들이 훈육을 멈추게 하는 신호가 되고 있다. ‘존중’이라는 말이 마치 모든 지도를 중단시키는 마법의 단어가 된 듯하다. 교사는 단호함을 잃고, 부모는 아이의 모든 행동을 ‘이해’라는 이름으로 덮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자. 정말 아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 아이의 모든 행동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일까? 존중과 허용은 다르다. 존중이란 아이의 말과 감정을 귀 기울여 듣는 태도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행동까지 용납하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건 옳지 않다’고 가르치는 과정 속에서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낀다. 진짜 존중은 아이의 감정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감정이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경계를 세워주는 일이다. 예를 들어, 아이가 친구를 때렸다. “왜 그랬니?” “화가 나서요.” 그 감정을 이해해주는 건 필요하다. 그러나 그다음 말은 분명해야 한다. “그래도 때리는 건 안 돼.” 이 단호한 한마디가 아이에게 ‘감정과 행동은 다르다’는 세상의 법칙을 가르친다. 감정은 파도처럼 일었다가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