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에듀 | 공교육은 입시와 경쟁, 시험, 서열 등으로 아이들의 생각과 삶을 단단하게 고정해 놓고, 삶 자체를 좋은 성적,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이라는 정해진 트랙 위에서 움직이게끔 한다. 이 트랙을 성실하게 달리는 사람에겐 모범 학생이라는 훈장을 준다. 그런데, 울산 최초의 공립 대안중학교인 울산고운중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넘어 저항적이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철학 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과 삶에 대한 사색의 의미를 알려준다. 이에 <더에듀>는 아이들이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유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는 데 도움을 주는 박상욱 철학교사의 수업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교육이 경쟁과 입시로부터 자유로울 때 아이들의 철학적 사유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더욱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강렬하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왜 그렇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 때문에 제약되는 것이 너무 많다. 먹는 것부터 노는 시간과 장소까지 온갖 것들이 제약의 대상이다. 특히 학교라는 시공간은 아이들의 삶을 옭아매는 족쇄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스스로 경제적 독립을 이루게 되면 자유롭게 여행도 가고, 사고 싶은 것도 마음껏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모순적이게도 대부분의 어른들은 오히려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사회와 타인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어린 시절이야말로 진정 행복했던 기억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 가족에 대한 책임, 사회적·경제적 성공에 대한 압박,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로 인해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낀다.
이렇듯 어른과 아이는 서로 대립적이고 모순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를 질투하며 그리워한다. 서로를 만나고 이해하려고 애를 쓸수록 더욱 멀어지는 듯하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의 관계처럼 말이다.
오늘 아이들은 수업에서 ‘어른과 아이 중 누가 더 자유로울까?’라는 질문을 제안했다.
철학소설 『마크』를 읽고 만든 질문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최근 교실에서 논란이 되었던 사건과 더 관련이 깊은 것 같았다. 학생들이 휴대폰 사용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휴대폰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학생들의 휴대폰 사용만 제한하는 것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수업에서 이 질문을 제기한 예성이는 어른들이 아이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것 같다고 말했다.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기 때문이었다.
예성: 저는요. 어른이 되면 지금 못하는 일들도 다 할 거예요.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시고, 운전도 하고 일본에 가서 피규어도 사고, 다 할 거예요.
예성이가 이렇게 질문에 대한 보완 설명을 하자, 다른 아이들도 즐겁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들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모습들이 너무나 즐거워 보여 잠시 자유롭게 말하게끔 두었다. 나는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정리되는 것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
나: 정말 어른이 되면 지금보다 더 자유로울 거라고 생각해? 민성: 사실 저는 어릴 때가 더 자유로울 것 같아요. 생각이 더 자유롭잖아요. 이렇게 아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금뿐일 것 같아요. 승우: 맞아. 경험이 많아질수록 제약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나: 처음하고는 의견이 많이 다른 것 같은데? 유진: 민성이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우리도 아기였을 때에는 지금 보다 더 자유로웠어요. 나이가 많아질수록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지는 것 같아요. 승우: 그렇네. 유치원 때만 하더라도 내 맘대로 했던 것 같은데... 아름: 어른이 되면 더 제약이 많아질 것 같아요. 나: 어떠한 제약을 말하는 걸까? 아름: 생각의 제약이죠. 생각이 제약되면 행동도 제약되는 것 아닌가요? 민성: 제약이 많아지면 되면 자유롭지 못한 거죠. 예성: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우리는 경제적으로는 자유롭지 못해요. 어떤 것을 사고 싶어도 부모님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요. 준이: 학생 때는 모든 것을 간섭받아야 하잖아. 나: 어떤 간섭을 받고 있니? 예성: 귀가 시간이요. 민성: 공부나 성적에 대한 간섭이 제일 심하지 않을까요? 수진: 우리 학교는 그런 거 없잖아. 공부도 안 하면서 <다 같이 잠시 웃는다> 민성: (약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른 학교 학생들은 그렇다는 거지. 유진: 대부분은 학교와 집에서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 같아요. 수진: 밤 늦게까지 휴대폰 사용하는 것도 못 하게 해요. 승우: 그건 당연한 거 아냐? 수진: 자유롭지 못한 것은 맞지. 근데 어른들은 마음대로 하잖아. 민성: 생각이 바뀌었어요. 어른들이 어린이에 비해 더 자유로운 것 같아요. |
아이들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이들과의 철학적 대화에서 경험적 사례는 필수적이다. 추상은 구체를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른’과 ‘아이’라는 개념은 추상화되기 이전에 구체적인 경험의 집합체이다. 어른과 아이 중 누가 더 자유로운지에 대해 탐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의 경험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어른의 경험과 아이의 경험은 분명 서로 다르다. 위 대화를 보면 아이들은 어른들의 갑섭이 자신들의 자유를 제약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어른들은 아이들의 삶을 통제하고 간섭하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피곤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어른과 이는 하나의 생활세계 속에서도 서로 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
나: 너희들이 말하는 자유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수진: 이 질문은 예전에 다룬 것 같아요. 억압받지 않는 거요. 나: 우리를 억압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유진: 법이나 도덕 같은 거요. 승우: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간섭이요. 근데 선생님은 우리를 너무 방치하는 듯한 느낌도 있어요. <아이들은 다 같이 박수 치며 웃는다> 나: 그래. 앞으로는 좀 더 빡빡하게 해 볼게. 각오는 알아서들 하고!! 그런데 외부적인 간섭이나 억압만 없으면 자유로울까? 예성: 그렇죠. 나를 구속하는 것이 없으니까요. 지성: 아냐. 우리가 처음에는 생각이 많으면 자유롭지 않다고 했잖아. 내적인 억압도 있지 않을까? 수진: 스스로 자신을 억압한다는 거야? 준이: 맞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아도 자유롭지 않을 때가 있잖아. 나: 정말 멋진 의견인데!! 혹시 그 생각에 대한 예를 들어 볼 수 있을까? 주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고민될 때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인생이 갑갑할 때가 많거든요. 지성: 옷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도 나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항상고민돼요. 유진: 화장도 마찬가지겠네. 승우: 그건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 아닐까? 아름: 결국 내 욕구 때문에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야? |
외적인 억압으로만 논의를 이어가던 아이들은 내적인 억압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내놓기 시작했다.
앞서 아이들이 스스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원인은 외적인 억압 때문이었다. 토론 초반에 아이들은 생각이 많거나 경험이 많으면 더 자유롭지 못하다는 의견을 제안했다. 하지만 토론이 진행되면서 이 의견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내심 이 생각이 다시금 논의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지성이가 이 생각을 다시 수면으로 이끌어 낸 것이다. 너무나 고마워서 소리칠 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연기를 했다. 그 순간 나는 철학적 탐구공동체가 하나의 연극 무대처럼 느껴졌다. 마치 대본이 없는 연극 같았다.
아이들은 내적인 억압의 예로 욕구를 언급했다. 타인에게 신경 쓰고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 역시 욕구 때문이라는 것이다.
문득 나는 욕구와 자유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흔히 욕구는 육체와 관련된 것으로 인식되며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를 향한 관조를 방해하는 요소이다. 성리학에서도 기질지성(氣質之性) 즉 욕구는 인간의 타고난 선한 본성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욕구 그 자체는 인간의 선한 본성과 근원적 자유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물론 이 과정에서 욕구와 욕망의 관계, 신체와 정신의 관계에 대해 더 깊이 다루었으면 하는 욕심도 있었으나 살며시 접어두었다.
|
나: 욕구대로 사는 게 자유로운 걸까? 욕구를 절제하며 사는 것이 더 자유로운 걸까? 준이: 아~ 어렵다. 승우: 욕구를 다 만족시킬 수 있다면 자유롭겠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유진: 램프의 지니가 있으면 가능할까? 드라마에서 김우빈이 소원 다 들어주잖아. 아름: 그것도 3개밖에 소원을 안 들어주잖아. 주윤: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돈을 벌어야 해요. 그러면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거죠, 나: 욕구가 자유를 억업한다는 뜻이니? 주윤: 정확해요. 나: 근데 그 욕구는 너희 자신에게 속한 거 아닐까? 지성: 욕구가 곧 나라는 뜻인가요? 민성: 사람마다 자신만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아름: 욕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생기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보다 어른들이 욕구가 더 많잖아요. 그건 학습되는 거 아닐까요? 예성: 아냐. 아이들이 더 욕구가 많지. 사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지성: 그건 모르지. 어른이 아니니깐... 아름: 욕구가 학습되는 것은 맞는 것 같아요. 승우: 욕구가 학습된다고? 아름: 어릴 때는 예뻐지고 싶다던가, 화장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커 가면서 생긴 거지. 어딘가에서 배운 것 같아. 민성: 생각해 보면, 아프리카에 사는 아이들은 우리와 욕구도 다를 것 같아요. 캐릭터 인형을 사고 싶다던가,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겠지. |
놀랍게도 아이들은 라깡의 욕망 이론에 가까운 사유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라깡은 우리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욕망은 타인을 통해 생산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를 학습된다는 말로 표현했다. 얼마나 간명한 표현인가!! 그토록 어렵게만 느껴지던 철학적 개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체화된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그 예도 멋졌다. 우리는 본래 화장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TV 속 연예인을 보거나 상업 광고와 사회적 평가 등을 통해 학습한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타인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대표적으로 명품이라는 불리는 상품들을 보라. 대부분의 사람은 브랜드를 제외하면 그 제품에서 어떠한 특이성도 발견하지 못한다. 단지 많은 사람이 그 제품을 격렬하게 원하기에 우리는 그 제품을 원하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생각에서 민성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문화마다 욕구의 종류도 다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완벽한 연역 추리였다.
|
대전제: 개인의 욕구는 사회적 욕구를 학습한 것이다. 소전제: 사회적 욕구는 문화마다 다양할 것이다. 결론: 개인의 욕구 역시 문화마다 다양한 것이다. |
이렇게 욕구와 자유의 관계를 넘나들면서 대화를 이어간 아이들은 또다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갔다.
이런 순간은 매 토론마다 보여진다. 철학적 탐구공동체 안에서 아이들은 강물의 흐름에 따라 나아가는 물고기처럼 논증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간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시 최초의 질문을 찾는다. 멀리 바다로 나아갔다가 다시 자신이 태어났던 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들을 보는 느낌이다.
|
수진: 어린이가 어른보다 더 자유로운 것 같아요. 아이들은 어른보다 주변이나 타인에게 신경도 더 쓰지 않고, 외부에서 주입된 욕구도 거의 없으니까요. 승우: 어린이는 부모의 보살핌만 신경 쓰면 되지만, 어른들은 아니예요. 사회적 시선, 직장, 경제적 문제같이 신경 쓸 게 많아요. 아름: 어린이들보다 편견이나 고정관념도 더 많은 것 같아요. 나: 어떤 것들이 있을까? 아름: 돈이 많으면 행복하다. 예성: 좋은 대학에 가야 성공할 수 있다. 유진: 착하게 살아야 한다. 준이: 그건 아니지...하하하하하 아름: 어쨌든 경험을 많이 하고 많이 배울수록 편견도 많아지는 것 같아요. 지성: 아이들은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잖아요. 준이: 음... 제 생각에는요. 어른들은 암묵적인 제약이 더 많은 것 같고요. 아이들은 직접적 제약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수진: 조금 암울한데... 나: 왜? 수진: 우리는 자유롭고 싶어서 이렇게 공부를 하는데, 어른이 될수록 더 스스로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는 거잖아요. 유진: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아. 나: 외적으로 억압받아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승우: 어린 아이들을 보면 그런 것 같아요. 항상 매사에 즐거워 보이잖아요. 주윤: 어른들도 아이처럼 살 수는 없을까? 수진: 그게 가능해? |
철학은 보편성을 지향한다. 하지만 어린이철학에서 말하는 보편성은 어떠한 절대적 소실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호주관적인 균형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관점채택 능력이 필수적이다.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노닐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아렌트는 ‘방문하기’라는 말로 표현한다. 상상력을 활용하여 타인의 삶에 방문해 보는 것이다.
위 대화에서 아이들은 서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어른과 어린이의 생활세계를 넘나들며 방문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자유에 대한 직접적 제약과 암묵적 제약이라는 독특한 개념 경계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인간에게 자유는 근원적인 욕구이자 지향점이다. 장자는 소요유(逍遙遊)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 자유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스스로를 더욱 자유롭지 못한 구조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듯하다. 철학자 한병철이 『피로사회』에서 언급한 자기착취의 매커니즘처럼 말이다.
아이들은 이 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어떠한 희망과 탈출구도 찾고 있었다. 그 지점에서 ‘어린이’가 등장했다. 어떠한 외적, 내적 억압에도 휘둘리지 않는 천진난만함, 근원적 자유의 모습을 어린이에게서 본 것이다.
물론 그 마지막은 ‘그게 가능해?’라는 질문으로 끝을 맺었다. 그렇다. 우리는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억압적 구조 속에서도 자유를 캐묻고 그게 가능하냐는 질문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어린 아이들이 어떠한 순간에도 질문을 놓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학자 케네디는 우리 내부에 있는 ‘아이-되기’의 감수성이야말로 지구적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