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나는 중등학교 역사 시간 서세동점기에 태국은 인도차이나반도 중앙에 위치해 식민지를 당하지 않았다고 배웠다. 완충국이어서 식민지가 되지 않는 행운을 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근 태국을 여행하면서 완충국만으로 독립을 지켜낸 것이 아님을 알고, 역사를 제대로 가르쳐야 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조선 고종, 일본 메이지, 태국(당시 시암) 라마 5세는 모두 유사한 시기에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왕으로 40여 년 간 재위했다.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세 군주는 모두 19세기 말~20세기 초 동아시아 근대화와 제국주의 시대의 중심인물로, 제 나라의 운명을 크게 바꾼 지도자들이었다. 일본 메이지는 근대화에 성공해 식민지를 거느린 제국이 되었고, 조선 고종은 근대화와 외교에 실패해 식민지로 전락했으나, 태국 라마5세는 나라의 독립을 지키자는 노력으로 나라를 지켜냈다.
세계사에 비추어 세 군주가 당시 적절한 선택을 했는지, 그 선택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비교사적으로 보면 더 잘 보인다. 세 나라의 군주를 비교해 보기로 하자.
태국(당시 시암) 라마5세
태국의 쭐랄롱꼰Chulalongkorn 라마 5세(1853~1910, 1868~1910 총 42년간 재위)는 당시 시암(현재 태국)의 근대화를 이끈 대표적 군주이다. 그는 아시아 군주 중 최초로 유럽을 방문했고, 근대화에 앞장선 일본을 방문(1897)해 메이지 정부와 교류하면서 일본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았다. 일본의 서구 문물 수용, 독립 유지 전략을 배우고 군사 행정 개혁을 참고했다.
일찍이 근대적 개혁, 균형 외교를 통한 독립 유지에 애썼던 라마 4세를 이은 라마5세는 태국에서 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서양식 근대적 행정제도와 법률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확립하였으며 근대적 군대를 창설했다. 철도 건설, 우편 전신 제도를 도입했다. 단계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고 서양식 학교를 세워 국민을 교육하여 ‘국민통합’을 이루었다.
그는 태국의 근대화를 서둘러 미개한 나라를 문명화한다는 제국의 식민지화 명분을 극복했다.
인도·버마·말레이를 차지한 영국의 동진(東晉)과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병합한 프랑스의 서진(西晉) 사이에서 독립 외교를 벌여 국가의 식민지 전락을 막았다. 태국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 중립지대, 즉 완충지대를 두면 좋다는 양국의 이해관계를 잘 활용한 균형 외교, 중립 외교를 한 것이다.
태국은 말레이·라오스·캄보디아 등 일부 영토를 양보해 ‘살을 일부 베어주고 뼈를 지키는’ 전략을 유지했다. 라마 5세는 태국은 노예제 폐지와 내부 통합, 근대적 법제와 행정제도 도입, 서양식 군대 학교 철도 통신망 구축, 능숙한 외교술, 일본 성공 사례 모방 등으로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데 기여해 ‘대왕’으로 칭송된다.
일본 메이지 천황
일본의 메이지 천황(1852~1912, 1867~1912 총 45년간 재위)은 메이지유신(1868)의 주역이다. 에도 막부체제를 종식시키고, 폐번치현을 통해 봉건적인 번체제를 폐지하여 지방영주의 권한을 박탈했고, 사무라이의 특권과 칼 차는 것을 폐지하였으며, 일부 사무라이 엘리트를 중심으로 천황중심의 중앙집권 국가를 수리했다.
그는 근대적 메이지 헌법을 공포(1889)하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했다. 서양학문을 적극 수용하고 의무교육체제를 도입했다. 오늘날 동아시아 교육에 쓰이는 교과명이나 주요 학술어는 거의 모두 일본이 정립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철도 건설, 근대적 은행제도, 군수, 제철, 조선 산업을 육성했다. 징병제(1873)를 도입했고 서양식 육·해군을 창설하여 수뇌들은 내각을 거치지 않고 천황과 직접 국정을 상의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조선과 대만에 영향력을 확보했고, 과학적으로 철저히 준비한 러일전쟁의 승리로 세계 강대국 반열에 올랐다.
메이지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해 천황과 의회가 협치하는 근대산업국가로의 전환에 성공하였고,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도약하면서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로 하는 제국으로 발돋움시켰다.
앞서 라마 5세가 노예제 폐지, 절대군주의 왕권을 지키는 중앙집권화, 서양식 법 행정제도 도입, 영토 일부 양보 등으로 식민지화를 방지하면서 국가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방어적 근대화’를 했다면, 메이지는 막부체제 붕괴, 징병제 도입, 공업화, 해외 전쟁 수행 등으로 서구 열강과 동등한 강대국 제국으로의 ‘공격적 근대화’를 했다. 나라를 지키는 근대화와 강대국이 되기 위한 근대화의 차이였다.
조선 고종
조선(대한제국)의 고종(1852~1919, 1864~1907 총 44년간 재위)은 초기는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통해 쇄국정책을 펼쳤고, 친정을 하면서 근대행정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1897)하여 절대왕권을 수립했고 형식상 청나라와 종속관계에서도 조금 벗어났다. 근대적 토지조사사업, 상공업 진흥, 전차 철도 우편 제도 도입, 별기군과 같은 신식군대로의 재편을 시도한 광무개혁도 단행했다.
그러나 개화파와 수구파의 갈등, 외척의 발호, 갑신정변(1884)과 동학농민운동(1894) 등으로 혼란을 거듭하여 좀처럼 근대화의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양반중심의 신분제는 유지됐고, 근대국민국가를 만들 수 있는 ‘국민’을 만들지 못했으며, 결국 근대적 의미의 국민통합을 이루지 못했고, 전통적 봉건적 왕조체제에 머물렀다.
외교는 국제관계나 국제정세를 읽지 못하고 친청, 친러, 친미로 옮아가며 갈팡질팡했다. 그 결과 1095년 을사조약으로 인한 외교권 박탈, 1907년 강제퇴위·정미7조약으로 인한 군대 강제 해산으로 1910년 한일합방을 맞이했다.
우리가 배우지 못한 한일병합조약의 내용은 왕과 왕실, 고관대작, 지방유지 등에게 작위와 은사금 및 관리로의 등용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총 한 방 안 쏴보고 나라를 팔아넘겼다. ‘착한 조선’이 ‘나쁜 일본’에 의해 강점당했다는 가르침은 매우 의문시된다.
고종은 자주독립의 인식은 있었으나 국제정세와 국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불우한 군주였다. 일본은 급속한 산업과 군사적 성장을 했으나, 조선은 국내의 혼란과 갈등, 경제 군사적 열위, 내부 개혁의 지지부진, 국제정세에 어두운 외교 실패로 인한 국제적 고립 등으로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세 나라, 세 군주 비교
역사학자 아널드 J. 토인비에 따르면 역사는 도전과 응전으로 엮인다. 이는 당면한 사태에 대한 서로 다른 선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같은 시대, 아시아에 닥친 제국주의 세계 질서, 서세동점의 유사한 위기, 근대국가를 만들고 국가의 독립을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한 다른 선택의 결과, 각국은 서로 다른 운명을 맞았다. 일본은 강해져서 살아남았고, 태국은 외교로 살아남았으나, 조선은 열강의 전장이자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본의 메이지 천황은 변혁군주로, 태국의 라마5세는 나라의 독립을 지키려 한 개혁군주로, 조선의 고종은 국내외 위기 속의 우유부단했던 불우한 군주로 자리매김했다.
근대화에 대해서도 일본은 메이지 유신, 신분제 폐지, 산업화로 급진적 근대화를, 태국(시암)은 노예제 폐지, 행정 개혁, 균형 외교로 점진적 개혁을, 조선은 갑오개혁, 광무개혁, 정치적 갈등, 개화파와 수구파의 갈등, 외척 발호, 외교 혼선으로 혼란스런 개혁에 휩싸였다.
제국주의와 국제정치 속 외교 전략을 비교해 보면, 일본은 팽창 전략을, 태국은 완충국 외교를, 종주국 청의 영향 아래 조선은 강대국 의존 외교를 채택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근대 국민형성을 통한 근대국가를 만드는 데서도 신분제 폐지, 군대와 징병, 국가 동원 능력, 산업 경제력 기술력 기반이 서로 달랐다. 결국 일본은 제국주의 강대국이 되었고, 태국은 독립국가를 유지했으며,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요컨대 19세기 후반 동아시아를 이끈 세 군주의 역사는 근대화와 독립은 당대 지도자였던 절대군주의 능력에 크게 의존했음을 보여준다.
메이지 천황은 결단력과 혁신적 개혁 의지로 일본을 근대적 산업국가, 강대국으로 탈바꿈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팽창까지 성공했다. 라마5세는 태국이 영국과 프랑스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균형 외교와 점진적 개혁을 능숙하게 조율했다.
반면 고종은 자주독립과 근대화에 대한 인식은 있었으나, 청일러 사이에서 국제정치에서 고립되고 경제·군사력에서 열세였던 구조적 한계, 내부 정치의 혼란과 개혁 지연으로 인해 병합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본인과 왕실은 별 손해날 것이 없었으나 식민지 아래 대다수 백성들은 노예적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절대군주의 능력과 의지와 그가 지휘했어야 할 내외적 조건으로 국가의 운명이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산업화 수준, 군사력, 국제 질서, 내부 정치 구조, 국민교육 등 외부적·구조적 요인을 잘 조율했을 때만 국가의 독립과 근대화가 가능했다. 즉, 일본과 태국은 능력과 환경이 맞아떨어졌고, 조선은 인식은 있었으나 내외부 구조적 제약 때문에 실패했다.
따라서 19세기 동아시아 근대화와 주권 유지의 역사는 군주의 능력과 그가 조율했어야할 구조가 서로 얽힌 복합적 역사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 군주의 선택과 운명을 통해 우리는, 국가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개혁의 추진력과 내외부 환경조건의 조화임을 깨닫게 된다.
20세기와 21세기 초반부 한국
미중갈등 속에서 오늘날 우리 역사교육을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원조를 받던 최빈국이 식민지에서 해방되고 공산화를 이겨내고 근대화와 민주화를 달성한 나라를 두고, 한쪽은 종북중러를 하면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한쪽은 한미일 동맹을 통해 자긍심과 애국심을 품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 교육에서는 19세기 말 조선이 여러 나라와 맺은 조약들을 종합 비교해서 가르치지 않는다. 단지 일본과의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불평등 조약으로 규정하면서, 조약의 특정 조항, ‘일본인이 조선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일본 영사관에서 처벌하고, 조선인이 일본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조선영사관에서 처벌한다.’에서 뒤는 자르고 앞만 가르치면서 불평등조약이라고 가르친다.
당시 조선이 일본과 서양 열강들(미·영·독·프·러)과 맺은 조약은 조선이 자주국, 독립국, 주권국으로 인정된 바이나, 청나라와 맺은 것은 대등한 독립국가 간 ‘조약’이 아니라 종주국과 부속국의 ‘장정’(章程)에 불과했다.
청은 우리가 서구 열강과 조약을 맺을 때마다 조선이 청의 부속국임을 단서 조항으로 할 것을 요구하여 거절당한 바 있었다. 얼마 전 시진핑은 세계를 향해 대한민국은 수천년간 자기들의 속방이었다고 비하 폭언했다. 당시 모든 조약을 나란히 비교해 보면 청나라와 맺은 ‘장정’이 가장 불평등했고, 다른 나라와의 조약은 유불리를 따져서 교육할 일이다.
우리는 일본과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나 식민지 청산의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심지어 6.25 이후 70여년 간 전쟁을 막아주고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도 숨기고 안 가르친다. 여차하면 반미를 하라고 가르친다.
일부 좌파진영 정치인들은 후쿠시마 원전오염수 선동에서 보듯이 왜곡된 역사를 배우면 결국 ’반일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선전선동에 악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역사를 편향되게 가르치는 것이다. 국민들을 이렇게 우매하게 키운 대가는 장차 무엇으로 귀결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