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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학교로 간 어린이철학] ‘콩깍지’

더에듀 | 공교육은 입시와 경쟁, 시험, 서열 등으로 아이들의 생각과 삶을 단단하게 고정해 놓고, 삶 자체를 좋은 성적,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이라는 정해진 트랙 위에서 움직이게끔 한다. 이 트랙을 성실하게 달리는 사람에겐 모범 학생이라는 훈장을 준다. 그런데, 울산 최초의 공립 대안중학교인 울산고운중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삶을 넘어 저항적이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양한 시도들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철학 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과 삶에 대한 사색의 의미를 알려준다. 이에 <더에듀>는 아이들이 자유롭고 비판적인 사유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는 데 도움을 주는 박상욱 철학교사의 수업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는 “교육이 경쟁과 입시로부터 자유로울 때 아이들의 철학적 사유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서 더욱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만큼 사랑과 이성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는 시기가 또 있을까?’

 

사랑은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의 핵심적인 주제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평생을 두고 탐구해 나가는 문제이기도 하다.

 

몇 년 전에 나는 어린이 철학을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들과 사랑이라는 주제로 토론했던 기억이 있다. 명확하지 않지만, 대략 아래와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나: 사랑과 우정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요?

희정: 사랑은 남녀 간의 좋아하는 감정이고, 우정은 친구 간의 감정이죠.

문수: 친구 간에는 사랑해서는 안 되나요?

희정: 그럼 더 이상 친구라고 할 수 없겠지요.

나: 관계가 감정을 규정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감정이 관계를 규정하는 것일까요?

지영: 음.... 감정이죠.

문수: 그럼 사랑이라는 감정과 우정이라는 감정의 본질적인 차이를 살펴봐야겠네요.

 

위 토론의 결론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우정’이라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적인 차이에 관한 토론은 끝없이 이어졌다. 일생에서 수많은 사랑을 경험해 봤던 어른들에게도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오늘 철학 수업에서 아이들과 함께 읽은 ‘철학 소설 마크(Mark)’(국제어린이발전연구소(IAPC)에서 개발한 어린이 철학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에서는 이성 교제에 대한 장면이 나왔다.

 

이성 친구와 함께 데이트하면서 생각이나 감정이 맞지 않아 고민하는 대화에서 아이들의 시선이 멈추었다.

 

나는 소설의 일부를 아이들과 함께 읽은 후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하게 했다. 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안했다.

 

준이: 서로 마음이 잘 맞는다는 것의 기준이 무엇일까?

주윤: 배우자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민규: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지성: 사랑하는 사람의 사생활까지 간섭해도 될까?

 

나는 아이들의 질문들을 듣는 순간, 내심 준이의 질문에 마음이 끌렸다. ‘마음’이라는 주제 자체가 철학적으로 고민해 볼 쟁점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준이의 질문을 보는 순간 ‘마음이라는 것이 뭘까?(개념적 질문)’/ ‘서로 마음이 맞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해석학적 질문)’/ ‘서로의 마음을 맞는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인식론적 질문)’

 

이와 같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아이들과의 토론을 어떻게 이끌어가면 좋을까? 하는 고민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철학적 토론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선택했다.

 

이 질문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많은 연인이 서로에게 대한 불만 때문에 헤어진다는 것이다. 그 불만의 대부분은 자신이 싫어하는 상대방의 행동이나 습관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민규는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습관이나 행동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 질문을 만든 민규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 의미와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질문은 우리가 이성 교제할 때 가장 크게 하는 고민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에서 어디까지 변화를 요구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사랑과 관심, 폭력 사이의 미묘한 경계선을 넘나든다.

 

나: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원하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요?

민규: 그렇죠. 대부분은 콩깍지 때문에 사랑을 시작하거든요.

나: 콩깍지?

지성: 단점이 보이지 않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좋게 보이는 착각 같은 거죠.

아름: 콩깍지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을 하게 돼요. 그래서 나중에는 싸우는 거에요.

민성: 보통 콩깍지가 900일 정도 간다고 하던데요.

나: 사랑과 콩깍지는 다른 거야?

민규: 콩깍지도 사랑이죠. 원래 사랑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유진: 하지만 콩깍지가 사라져도 사랑은 계속돼요. 우리 부모님도 그래요.

 

민규의 말에 교실의 아이들은 크게 웃었다.

 

민규는 ‘사랑’이라는 것이 원래 논리나 사고가 작동되지 않는 감정이라고 본 것이다. 하지만 콩깍지가 사라지고 나면 상대방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감정의 미묘한 변화는 누구나 한 번쯤 겪어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유진이는 콩깍지가 사라져도 사랑은 없어지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말에 대해 지성이도 동의했다. 만약 사랑이 900일밖에 지속되지 않는다면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 허무할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럼 사랑하면 상대방이 원하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아이들은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본격적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민성: 솔직히 습관이나 기질은 쉽게 바꿀 수 없을 것 같아요.

주연: 좋아하는 영화, 음악, 스포츠 취향 같은 것은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유진: 그 정도는 가능하지. 하지만 성격 같은 것은 바꿀 수 없지 않을까?

민성: 맞아.

주연: 그럼 넌 여자친구가 게임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야?

민성: 음...그건 힘들 것 같은데, 모르겠다.

주연: 그럴 줄 알았어!!

민규: 근데 자기 취향에 맞게 상대방을 맞추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니야?

주연: 폭력적이긴 해요.

아름: 사귀는 사이라면 어느 정도는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죠. 그걸 폭력이라고 하면 연애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준이: 어디까지가 배려이고, 어디부터가 폭력인 거야?

 

이후 이어지는 아이들의 대화는 사랑, 배려, 폭력, 변화할 수 있는 것과 변화할 수 없는 것이라는 주제들이 오고 갔다.

 

대화의 중심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에게 어디까지 자신의 취향이나 생각을 요구할 수 있는가?’였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꼭 맞춰주어야만 하는가? 이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인지 폭력인지에 대해서는 쉽지 않은 논쟁이 이어졌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소유적 사랑과 존재적 사랑으로 나눈 바 있다.

 

‘소유적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방을 나의 통제 하에 두고 싶어 한다. 집착과 질투가 그 특징이다.

 

반면 ‘존재적 사랑’은 상대방의 존재 그 자체를 존중하고 함께 성장하려는 마음을 강조한다.

 

오늘 아이들의 토론 속에서는 ‘에리히 프롬의 사유’가 깊이 녹아져 있었다.

 

 

민성: 사랑하는 사이라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름: 그것도 맞는 말인 것 같은데...

유진: 맨날 게임만 하고, 약속 시간에 늦는 것도 무조건 이해해 줘야 한다는 거야?

주연: 그건 아니지. 그건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거야.

나: 그럼 배려와 폭력의 그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아름: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잖아요. 두 사람이 잘 이야기해서 합의를 봐야죠.

민규: 그게 잘 안 되니깐... 맨날 싸우지. ‘이혼숙려캠프’에 나오는 사람들이 다 그렇던데.

유진: 그래서 우리 반도 맨날 싸우는 거야?

 

유진이의 말에 아이들은 함께 크게 웃었다.

 

이후 아이들은 조용히 철학 노트를 펼치고 글을 썼다. 다음은 민규가 쓴 글의 일부이다.

 

“사랑하는 것과 콩깍지는 다르다. 어찌 같겠는가? 사랑은 훨씬 오래도록 변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진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 만약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을까?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변할 것 같다. 왜냐하면...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바라는 모습대로 되고 싶을 거니깐...”

 

(*본 원고에서 나오는 이름은 가명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박상욱 = 17년간 중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치다가 2년 전부터 공립 대안중학교인 울산고운중학교에서 철학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부산교육대학교, 부산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강의를 했으며, 한국철학적탐구공동체연구회 연수국장, 서울교육대학교 어린이철학교육센터 학술이사, 한국어린이철학교육학회 총무이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는 『바이러스 철학을 만나다』가 있고 공저로는 『문해력과 사고력을 길러주는 교실 속 철학 토론』, 『도덕적 시민의 눈으로 세상 읽기』, 『생각하는 교실, 철학하는 아이들』이 있다. 공역으로 『아이들과 철학하는 삶』, 『더 나은 사고를 위한 교육』이 있다. 최근에는 어린이 존재가 가진 철학적 가능성과 그 의미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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