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국민은 국가의 주인으로서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고 권력을 위임한다. 따라서 국민은 자신이 위임한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또한 국가는 다수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국민이 국가 운영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을 때 국민주권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실은 ‘정치적 중립’이라는 덫에 걸려, 유권자로서 정치적 공론장을 경험하며 정치적 통찰력과 철학을 학습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학교 교육의 주된 목표는 민주시민교육이다. 정치는 국민의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적 중립’이라는 프레임이 교육에 씌워지면서 정치는 금기의 영역이 되고 있다.
정치에 대한 판단은 사법부가 담당하고, 비평은 정치인과 평론가가 담당한다. 나머지 국민들에게 정치는 말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고 체면이고 예의가 되었다. 공론의 장에서 끊임없이 토론으로 이어져야 할 정치가 지극히 비밀스러운 사적 영역처럼 치부되고 있다.
히틀러는 “지배자에게 대중이 생각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교실에서 교사의 정치적 중립이 아이들이 생각하기를 멈추게 만들고 있다.
정치는 집단지성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선거는 시민 권력이 시민 대표를 선출해 권력을 위임함으로써 국가권력을 탄생시키는 과정이다. 나의 이익이 아니라 국익의 관점에서, 나의 대표가 아니라 우리의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시민 권력은 더 좋은 권력을 탄생시키기 위해 정보를 교환하고, 토의하고, 논쟁해야 한다. 그리고 각자 투표소에서 자신의 양심과 소신에 따라 한 표를 행사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한 표의 행사는 보장하되, 그에 전제되어야 하는 토론의 과정은 극도로 억압하고 있다. 다수결의 원칙에서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충분한 대화와 토론인데 말이다.
현실 정치에 대한 정규 교육은 부재하고 그 자리를 유튜브나 SNS, 또는 사이비 종교와 몇몇 비밀 조직이 대신하고 있다. 아이들은 누군가를 조롱하고 폄훼하는 등 자극적이고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밈과 쇼츠 영상을 통해 정치를 배운다. 그리고 그것의 대부분은 일베적이고 파시즘적이다.
심지어 일본의 입장에서 일제강점기를 정당화하고, 초등학생들은 놀이처럼 전직 대통령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며, 중학생이 되면 소수자를 혐오하고 조롱하는 파시즘적 성향을 보인다. 독재자를 영웅시하고 심지어 히틀러를 존경한다.
아이들은 이렇게 사적인 영역에서 거짓과 조롱과 비하가 가득한 현실 정치를 접하는데, 공교육은 ‘정치적 중립’을 준수하느라 그 어떠한 언급도 금지되고 있다.
경제교육에서는 실생활과 밀접한 금융교육을 강화하는 것과는 달리, 정치 교육은 반대로 가고 있다. 현실 정치는 철저히 금지되고 아이들은 대통령 이름만 언급해도 ‘정치적 중립’을 의심한다.
가장 큰 문제는 지금의 ‘정치적 중립’이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표현의 자유’와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보다 적극적으로 보장된다면, ‘정치적 중립’에 대해서도 더 포용적인 문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지나치게 모호하고 포괄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교육기본법에서의 정치적 중립에 대해서도 공직선거법에서와 같이 금지 사항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면 교실에서의 정치 수업도 지금처럼 현실로부터 동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초등학생들도 주식에 투자하며 현실 경제를 배우듯이 정치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배웠으면 좋겠다. 뉴스를 보고 정치적 이슈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토론하고, 팩트체크하고 선동가의 궤변을 가려내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와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사실의 축적이 진실의 발견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통찰과 철학이 있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교육의 역할이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가 금기시되는 사회는 틀림없이 민주주의에 위협적이다.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