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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교사 이야기] 돌봄, 이렇게 진행하면 어떨까요?

더에듀 | 실천교육교사모임은 현장교사들을 주축으로 현장에서 겪는 다양한 교육 문제들을 던져왔다. 이들의 시선에 현재 교육은 어떠한 한계와 가능성을 품고 있을까? 때론 따뜻하게 때론 차갑게 교육현장을 바라보는 실천교육교사모임의 시선을 연재한다.

 


자유롭지 않은 놀이는 없다


놀이는 ‘자유로움’을 필요로 한다. 공놀이는 넓은 공터에서 내 맘대로 찰 수 있을 때 놀이가 되고, 게임은 정해진 세상에서 내 맘대로 조작할 수 있을 때 놀이가 된다.

 

정말 그렇다. 필자의 어릴 적을 떠올려 본다.

 

낮은 아파트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단지에서 자전거와 인라인스케이트를 탄 아이들이 ‘약속 없이’ 만나 서로를 잡으러 뛰어다니면 놀이가 시작된다. 이 놀이에서는 누가 누구를 잡는 것인지 제대로 정해진 규칙조차 없다.

 

각자의 비비탄총을 들고 모여 주차된 자동차를 방벽 삼아 서로를 쏘면서 논다. 총을 이용해 상대를 맞추는 게 목표였지만 역설적이게도 맞추고 나면 그제야 후회하고 울면서 사과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분명 놀이였다.

 

이렇듯 모든 놀이에는 규칙이 있었지만, 사실은 규칙이 없기도 했다. 무엇이 우리를 재밌게 만드는지도 모른 채 그저 엉성함이 자유로움을 한층 더할 뿐이었다.

 

모든 놀이는 필연적으로 어떤 부분에서 자유로움을 요구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놀이의 ‘규칙 없음’이 아이의 일상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우려한다. ‘절제되지 않은 공놀이와 게임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 ‘규칙이 없는 놀이는 사람을 다치게 한다’는 이유로 어른들은 아이의 놀이를 제약하려 한다. 공놀이가 가능한 공간을 제한하고, 놀이마다 정해진 규칙을 강제로 적용하는 식이다.

 

그러나 어른에 의해 제약이 가해지고 아이들이 선택의 기회마저 빼앗겼을 때, 그것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대학생 시절 한 교수님이 말씀이 떠오른다.

 

“초등학생의 배움은 날 것의 경험을 잔뜩 흡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날 것의 경험들 속에서 새로운 생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반면 정제된 지식의 교육은 효율적이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기 어렵다. 놀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규칙에 가득 찬 놀이는 상상력을 유발할 수 없다. 어른이 부여한 규칙 아래에서 놀이는 상상력을 잃어버린다. 상상할 수 없는 놀이는 매력이 없다. 

 

좁은 공원에서 그네를 골대 삼아 이루어졌던 공놀이는 거대한 운동장에서 오히려 골대를 잃는다. 비비탄총과 차 벽을 이용해 전쟁을 벌이던 아이들에게 과녁을 향해 던지는 빨판 다트는 놀이가 될 수 없다. 상상력이 제한된 놀이는 오히려 기능대회에 가깝다.

 

더욱 안타까운 사실은 “아이들은 놀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일부 허용적인 어른들조차 ‘제한된 놀이’만을 긍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공놀이는 축구 교실로, 총을 쏘던 아이는 방 안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핵심은 아마 자유와 보호의 절충일 것이다. 혹은 어른이 모두 책임지려 하지 말고 일부라도 아이가 책임질 영역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한 돌봄에 대한 상상


예전에 장난삼아 친구들이랑 이상적인 돌봄에 관해 이야기 나눈 바 있다. 다시 한번 떠올려 보려고 한다. 재미로 들어줬으면 좋겠다.

 

우선 지역의 중심에 학교 크기의 공터를 확보한다. 학생이 줄어 폐교된 학교를 확보하면 딱이다. 일반적으로 학교에는 건물이 두 개 정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학교 부지를 활용한 지역 돌봄 시설을 만들면 어떨까?


가. 시설

공간은 크게 ‘활발한 공간’과 ‘차분한 공간’으로 나뉜다.

 

우선 '활발한 공간'은 일부 건물과 실외 공간을 활용하여 이루어진다. 야외에 놀이터를 설치하고 일부 실내 공간에 놀이방을 만들 수 있지만 대부분의 ‘활발한 공간’은 비어 있는 채로 유지될 것이다.

 

공터에는 잔디를 깔고, 건물 내부는 완전히 비워놓을 것이다. 핵심은 놀이에 쓰일 수 있되 어떤 용도도 정해져 있지 않은 공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필자가 어릴 적 뛰어놀던 주차장이나 동네 마을처럼 말이다.

 

남은 건물을 활용해 ‘차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독서, 공예, 표현활동 등이 이루어질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말이다.

 

활발하게 놀이를 진행하는 공간과 차분하게 놀이를 진행할 공간을 분리한다면 아이들이 매일 매일 성향에 맞는 공간에 참여하여 내외면적 균형을 맞춰줄 수 있을 것이다.

 

나. 규칙

이 두 공간에서의 규칙은 최소한으로 존재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진행하는 놀이의 암묵적 규칙은 자주 불합리할 때도 있겠으나 반드시 아이들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이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놀이의 전제 조건이다.

 

최소한의 규칙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갖는 두 공간의 활동에 각자 방해하지 않도록 하는 규칙’

‘현재 기준에 따라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활동을 방지하기 위한 규칙’

 

이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범위 내에서 놀이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다. 보호 방안

자유가 주어진 아이들에 대해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우선 전체 시설은 높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입구는 단 하나뿐이어야 한다. 돌봄 인력과 사전에 허락받은 보호자만이 출입할 수 있게 해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차단한다.

 

모든 시설물은 설비 단계에서 철저한 안전성 검토를 받을 것이다. 안전성 검토의 기준은 초등학생 이상의 아이가 갖는 판단 능력으로 예측할 수 없는 위험 요소에 대한 차단이다.

 

초등학교 1학년 정도면 아이들은 위험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는 나이이다. 어른이 기본적인 안전 환경을 마련해 주고, 아이가 자기 판단력을 발휘해 활동한다면, 그 자체로 충분한 안전 대비가 될 수 있다.

 

분명 아이들은 다칠 것이다. 그러나 표준에 따라 점검된 안전 설비 외의 위험 요소까지 모두 어른이 책임질 수는 없다. 그 이상의 위험은 아이 개인의 책임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물론 아이의 판단 능력은 어른보다 부족하다. 그래서 그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의 범위는 좁고 제한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고유한 판단 능력을 갖는 인간으로서 아이에게도 책임의 영역은 필요하다.

 

이 시설에는 비상 상황에 학생의 응급처치를 제공하고 보호자에게 인계하는 역할을 맡은 최소한의 돌봄 인력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어떠한 수업도 진행하지 않으며, 계획된 수업은 물론, 우발적인 개입이나 지시도 최소화할 것이다.

 

매일 일과가 끝나면 안전 회의를 통해 학생들의 활동 내용과 시설 내 위험 요소들을 점검하고 논의, 검토한다. 특히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들에 대한 검토가 주요한 논의 대상이다. 일부 아동의 특이 행동이나 노후화로 인한 시설 결함 등이 그것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이 돌봄 인력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안전 확보에 있으며, 아이는 자신의 행동으로 발생한 위험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안전에 대한 필요 이상의 개입과 규제는 아이의 놀이를 위축시킬 수 있다. 심지어는 아이들 간의 갈등에 대해서도 서로 간에 해결해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의 갈등 해결 경험은 귀중한 배움의 기회이다. 다만 폭력, 과도한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따돌림의 경우에는 피해자의 요청으로 적극 중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돌봄 인력의 지도 행위 역시 회의를 통해 결정된 요소에만 제한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필자의 상상은 여기까지이다.

 

글을 읽은 독자들은 느꼈겠지만 필자는 육아와 돌봄이 왜 이토록 어렵고 복잡하게 운영되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왜 돌봄은 이렇게나 어려워야 하는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사회의 불안’과 ‘학교를 향한 무한한 책임 요구’는 날이 갈수록 현장을 버겁게 만들고 있다.  

 

필자의 구상은 매우 허술하고 여러 문제점도 안고 있다. 그러나 허술하다고 느끼는 만큼 적은 부담과 합의할 수 있을 정도의 책임만을 요구하고 있다. 

 

이토록 허술한 구상 그대로 지금 즉시 실행에 옮겨진다 해도 오후 8시까지 ‘놀이처럼 보이는 수업’, 이른 바 늘봄수업을 강요받는 지금의 아이들보다는 훨씬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면 그것은 필자의 터무니 없는 자신감일까?

 

* 이 글은 실천교사 홈페이지에 게재된 것을 일부 재가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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