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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서 '길'을] ②병원행

외면 당한 고통이 남긴 상처

더에듀 | 한국은 자살률 1위라는 현실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회복의 힘을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도 품고 있다.  <더에듀>는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회복의 길을 걷고 있는 안신영 큐어링랩 대표의 ‘상처에서 길을’ 연재를 통해 조용히 상처를 견디고 있는 아이들에게 '너의 고통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세지를 전하고자 한다. 더불어 사회가 함께 공감하고 회복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여정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어제는 응급실에 다녀왔다. 미팅을 마치고 집에 가려고 역 입구에 섰는데, 눈앞의 계단이 끝없는 낭떠러지처럼 보였다. 발을 잘못 내디디면 세상 끝까지 굴러가다 죽을 것만 같았다. 간신히 계단은 내려왔지만, 지하철 안 가득 찬 사람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두려웠다. 택시를 타려면 다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조차 공포였다. 나는 한참을 역 안 의자에 앉아 울다, 결국 강남 세브란스 병원으로 향했다.

 

‘제발 이번에는 진료를 받게 해주세요. 돌아가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속으로 수백 번, 수천 번을 되뇌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제발 재워달라고, 살려달라고 말했다. 두 팔과 손목에서 피를 뽑았고, 옷이 벗겨지고, 온몸에 전자기기가 붙었다. 중간에 병실도 한 번 옮겼던 것 같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분명히 남아 있는 건, 그 순간 묘하게 안도감이 들었다는 사실이다.

 

6년 만에 처음으로, 공황발작 증상 하나만으로 응급실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내 고통이 외면받지 않고, 의료진이 즉시 반응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숨통이 조금 트였다. 누군가 내 고통을 인정해 준다는 것, 그것 하나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버틸 수 있는 최소한의 희망이 되었다.

 

김승섭 교수의 연구는 이 경험을 설명해 준다. 그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 “질병의 고통은 병 자체보다, 그 고통을 드러냈을 때 사회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2013년 한국복지패널 자료를 분석한 결과, 고통을 털어놨다가 주변에서 외면당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만성 통증을 호소할 확률이 2.3배 높았다. 또 사회적 지지를 받지 못한 우울증 환자는 치료를 중도 포기할 확률이 3배 이상 높았다.

 

즉, 병 그 자체보다 ‘내 고통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경험’이 고통을 악화시키는 것이다.

 

내가 응급실에서 느낀 안도감 역시, 증상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사회적 반응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인정받는 경험 하나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버틸 힘이 되었다.

 

나는 사실 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다. 투자도 받아야 하고, 대출도 받아 회사를 키워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대표가 이런 고통을 고백해도 될까 두려웠다. 투자자들이 나와 우리 회사를 ‘리스크’로 판단하면 어떡하나 걱정되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망설였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는 좀 말해야겠다. 그래, 나는 당사자로서 이제는 이 고통에 확성기를 달아서 널리널리 퍼뜨려야겠다. 숨기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감추는 사회적 분위기 자체가 문제의 일부라면, 나는 대표로서 오히려 더 말해야 한다. 개인의 약점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무심하다. 하루 평균 36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만, 우리는 그 죽음을 ‘극단적 선택’이라 축소한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는 ‘투병 끝에 사망했다’고 말하면서, 우울과 외로움 속에서 떠난 이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말한다. 같은 죽음이지만 태도는 달랐다. 언어의 차이는 결국 제도의 차이로 이어진다.

 

영국은 ‘외로움부 장관’을, 일본은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뒀다. 뉴질랜드는 GDP 대신 삶의 만족도와 친절, 신뢰를 국가 지표로 삼는다. 그러나 한국은 OECD 평균의 두 배가 넘는 자살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건강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 가장 아픈 사람들에게 가장 적은 지원이 가고 있다.

 

나는 이제 묻고 싶다.

 

-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변 사람의 “괜찮아”라는 대답 뒤를 살펴보나.

- 정책은 얼마나 진심으로 사람들의 고통에 응답하고 있나.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을 진짜로 괜찮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김승섭 교수는 말한다.

 

“건강은 의학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상처를 말했을 때 외면당하면, 그 고통은 몸에 새겨진다. 그러나 누군가 진심으로 들어주고 지지해 줄 때, 회복의 문이 열린다.

 

나는 괜찮아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어제 응급실에서 느낀 안도감처럼, 고통이 외면당하지 않는 순간 사람은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 고백이 언어를 바꾸고, 제도를 움직이며,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안부를 다시 묻는 시작이 되기를 바란다.

 

 

안신영= 예비 사회적기업 ㈜큐어링랩 대표 안신영. 사회적 기업가이자 청년 창업가로, 외로움과 고립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범죄 피해와 정신적 투병, 그리고 자살 시도를 겪은 경험은 필자에게 고통을 숨기기보다 사회적 언어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명을 남겼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에게 “다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해결책은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비언어적이고 평가하지 않는 반려동식물을 통해 신경생리학적 리듬을 회복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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