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한국은 자살률 1위라는 현실을 안고 있지만, 동시에 회복의 힘을 증명할 수 있는 가능성도 품고 있다. <더에듀>는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회복의 길을 걷고 있는 안신영 큐어링랩 대표의 ‘상처에서 길을’ 연재를 통해 조용히 상처를 견디고 있는 아이들에게 '너의 고통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세지를 전하고자 한다. 더불어 사회가 함께 공감하고 회복할 수 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여정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이다. 전 연령이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는 사회,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자살을 개인의 약함이나 선택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뇌과학은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고.
고립의 경험
나는 21살, 3년간의 범죄 피해를 입고, 28살인 지금까지도 정신과 약을 먹으며 트라우마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 시절, 세상은 나를 지켜주지 않았다. 피해 사실을 말하는 순간 더 큰 상처가 돌아왔고, 침묵은 곧 고립이 되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거리를 두었고, 나는 마치 투명 인간처럼 존재가 지워진 채 살아가야 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이 회복탄력성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사실은 우리 자신의 감정을 보호하는 방패로 사용한다.
가족과 친구, 동료들이 나에게서 조금씩 거리를 두고, 각자의 궤도를 따라 돌기 시작했다. ‘살펴보러’ 오는 발걸음은 점점 뜸해지고, 대화는 피상적으로 변하며, 상호작용은 얇아졌다.
처음 몇 주 동안은 공동체의 관심과 위로가 버팀목이 되었다. 그러나 여섯 달쯤 지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사람들은 내 이야기를 듣는 데 지쳐가고, “이제 치유와 희망을 이야기하라”는 요구가 늘어난다. 고통은 그대로인데, 그 고통을 부정하거나 없애려는 주변의 태도는 나를 더욱 고립시킨다.
우리는 자의적으로 “사람은 누구나 회복탄력성이 있다”고 선언하면서, 사실은 트라우마에 휩쓸린 사람들을 주변부로 밀어내는 일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몰려와 돕기도 한다. 하지만 그 도움은 흔히 부적절한 시간에, 무질서한 방식으로, 거의 언제나 트라우마에 대한 이해 없이 제공된다.
시간이 지나면 주변 사람들은 우리의 비극에서 시선을 거두고, “곧 괜찮아질 거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각자의 삶을 이어간다. 고립은 개인의 약함이 아니라, 사회적 무지와 외면이 만들어 낸 구조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33%는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고통을 말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뇌의 변화와 사회의 실패
트라우마는 뇌의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을 바꿔놓는다.
몇 초간의 충격적인 경험도, 수년간의 고립도, 뇌 깊은 곳에 남아 불시에 되살아난다. 원래는 적응과 보호를 위해 만들어진 기억이 시간이 지나도 떠나지 못하고 현재를 위협한다.
실제로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우울 위험군은 두 배 이상 증가했다. 한국 사회는 이미 전 연령대가 고립의 위험에 노출된 사회다.
회복의 리듬
나는 주말을 최대한 비워두려 한다. 나에게 회복은 물고기를 기르는 일에서 시작됐다. 물소리를 듣고, 밥을 주고, 어항을 청소하는 작은 반복이 무너진 내 시간을 붙잡아 주었다.
연구에 따르면, 하루 20분 자연 속을 걷는 것만으로도 우울 증상이 30% 줄고, 뇌의 안정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내게는 작은 어항 속 생명 돌봄이 그 자연과 같은 역할을 했다. 리듬은 뇌를 조절하고, 관계는 보상을 제공한다. 우리는 결국 ‘조절–관계–보상’의 순환 속에서 살아간다.
신경 가소성과 새로운 길
희망은 있다. 우리의 뇌는 신경 가소성이라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뇌는 사용 의존적으로 변화한다. 사랑받아 본 적 없는 사람도, 사랑을 경험하면 사랑을 줄 수 있는 신경망이 발달한다.
내가 여전히 회복을 말할 수 있는 것도, 물고기를 돌보며 얻게 된 작은 다정함과 리듬이 내 뇌에 새겨졌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이다.
감당하기 힘든 순간에도 우리는 45분 내내 고통을 토해내고 싶지는 않다. 대신 인생을 함께하는 애정 어린 사람들, 감수성 있는 이들이 수천 번에 걸쳐 건네는 짧은 치유의 순간들이 뇌를 바꾸고 우리를 살아가게 한다. 이것이 치유의 그물망이다.
많은 사람은 심리치료가 과거로 돌아가 그 사건을 없애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거는 지울 수 없다. 개인의 과거도, 대한민국의 과거도.
중요한 것은 그 위에 새로운 경로를 만드는 일이다. 심리치료는 뇌 속에 이미 존재하는 연상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상을 구축하고 건강한 기본 경로를 만드는 작업이다.
마치 2차선 비포장도로 옆에 4차선 고속도로를 새로 놓는 것과 같다. 예전 도로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 길만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알아야 치유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 뇌가 변화하는 방식을 본인이 이해할 때 치료 효과는 가장 크다.
뇌는 의미를 만드는 기계이다. 우리가 세계를 선하게 기대한다면 실제로 선행이 이끌려 나오고, 반대로 ‘나는 중요하지 않다’는 믿음은 단절과 무시를 현실로 불러온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트라우마가 어떻게 건강과 행동을 바꾸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이 칼럼을 쓰는 이유다. 알아야만, 효과적으로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전환을 위하여
우리 사회가 많은 돈을 쓰고, 좋은 의도로 정책을 내놓지만, 효과가 없는 이유는 뇌와 트라우마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육·보건·법 집행·청소년 사법·가정법원까지 모든 시스템이 발달과 트라우마 인식을 바탕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고립·중독·자살의 악순환 속에 머물 것이다.
고립과 외로움에도 장례가 필요하다. 사회 전체가 애도하고, 회복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외로움이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임을 드러내고, 그것을 애도하는 순간에야 우리는 다음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인간이라는 종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집단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능력, 그리고 그 접착제 역할을 한 ‘사랑’ 덕분이었다.
결국 우리 사회를 살릴 힘도 다르지 않다.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사회, 안전하게 관계 맺을 수 있는 사회, 새로운 길을 함께 낼 수 있는 사회. 그 길 위에서만 우리는 고립과 자살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다.
안신영= 예비 사회적기업 ㈜큐어링랩 대표 안신영. 사회적 기업가이자 청년 창업가로, 외로움과 고립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범죄 피해와 정신적 투병, 그리고 자살 시도를 겪은 경험은 필자에게 고통을 숨기기보다 사회적 언어로 전환해야 한다는 사명을 남겼다.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에게 “다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해결책은 폭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비언어적이고 평가하지 않는 반려동식물을 통해 신경생리학적 리듬을 회복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