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교수신문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변동불거’ 즉, 끊임없이 흘러가며 머무르지 않는 세태를 반영하는 표현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이 말은 단순한 철학적 명제가 아니다. 올해 한국 사회가 겪은 격렬한 진동을 정직하게 표현한 문장이다. 특히 교육 분야는 그 변동의 중심에서 정치 못지않은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올해 초 한 대학에서는 AI가 작성한 학위논문이 심사 과정에서 뒤늦게 발견돼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학생은 “AI를 쓰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진다”는 절박함을 토로했고, 교수들은 “기술이 아니라 교육이 먼저 무너지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올해 초부터 실시한 인공지능(AI) 교과서 채택은 제동이 걸려 교과서의 지위를 잃고 참고 자료로 전락했다. 2025년 전격 의무적 시행에 들어간 고교학점제는 현재 수많은 반대에 부딪혀 향후 거취가 불투명한 상태다. 이런 사건들은 변화의 파도를 타고 귀추가 주목되고 규정 위반은 아닐지라도 배우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탄이다. 또 다른 사례도 있다. 지방의 한 중학교에서는 학령인구 감소로 한 학년 전체가 ‘10명 이하’ 로 떨어졌다. 교사는 “이 아이들이 서로 경쟁 상대조차 없어 성취감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수도권의 대형 학교에서는 급격한 전입 증가로 교실이 포화 상태가 되어, 학생들이 복도에서 조별 과제를 하고 교사는 수업 대신 관리 업무에 매달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교육 불균형이 양극단에서 동시에 폭발하는 현실, 이 모든 것이 바로 ‘변동불거’의 잔혹한 현재다. 이처럼 변화는 이미 우리의 일상을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 위험한 것은 변화보다 느린 우리의 대응이다. 교육 정책은 여전히 ‘몇 년 뒤 적용’을 전제로 설계되고, 대학은 위험을 우려해 새로운 실험을 미루기 일쑤다. 하지만 기술과 사회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10년 뒤를 준비해야 할 학교가 10년 전의 기준에 붙들려 있다면, 그 사이의 ‘잃어버린 세대’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은 무엇인가? 첫째, 변화를 따라가는 교육이 아니라, 변화를 선도하는 교육으로의 전환이다. 단지 AI를 수업 보조 도구로 쓰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미 해외에서는 고등학생이 AI 모델을 직접 수정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 수업이 확산되고 있다. 반면 우리는 여전히 ‘AI 사용 여부’만 따지고 있다. 기술을 통제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창조의 재료로 보아야 한다. 둘째, 교육 의사결정 구조의 ‘속도 혁신’이 필요하다. 정책 하나가 현장에 도달하는 데 수년이 걸리는 구조로는 미래를 따라잡을 수 없다. 실험적 학교 제도, 모듈형 학사제 등 빠른 시범 운영과 즉각적 피드백 체계를 확립해, 변화에 ‘적응’이 아니라 ‘추진’으로 대응해야 한다. 셋째, 교육의 중심을 다시 ‘사람’에 놓는 대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기술 도입과 제도 개편이 아무리 급해도, 결국 변화의 충격을 견디는 건 학생과 교사다. 그들의 피로를 외면한 혁신은 오래가지 못한다. 학생의 학습 경험, 교사의 수업 자율성, 학부모의 신뢰, 이 세 가지가 단단히 서지 않으면 어떤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이제 ‘변동불거’의 해가 저물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흐름은 내년이라고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역사학자이지 미래학자인 유발 하라리 교수는 “변화는 미래의 유일한 상수(常數)”라 했다. 세상은 이미 새로운 속도로 빠르게 달리고 있고, 교육이 따라오지 못하면 가장 큰 피해는 아이들 몫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변화의 파고가 밀려올 때마다 뒤로 밀려날 것인가? 아니면 그 파도 위에 올라타 새로운 길을 열 것인가? 지금처럼 흔들리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분명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 어떤 변동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교육의 방향,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 폐쇄가 아니라 개방, 과거의 답안지가 아니라 미래의 질문지를 선택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변동불거’는 우리에게 “변화 속에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꿀지는 스스로 결정하라”고 말한다. 그 결정을 미루지 않는 용기, 그것이 다음 시대를 밝히는 첫걸음이라 믿는다.
더에듀 | 2022년 기준 학업중단학생이 매년 5만여명을 넘어선 것으로 조사됐다. 학업 중단 학생들은 대안교육기관을 통해 기초·기본 교육을 받으며 검정고시 등을 통해 학력 인정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교육기관에서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어떤 교육을 진행하고 있을까. 또 그 안에서 학생들은 어떤 성장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까. <더에듀>는 지난해에 이어 금산간디학교 아이들이 작성한 자신의 성장 기록을 통해 대안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여러분 모두 3학년 교실 옆에 있는 클라이밍 벽 한 번씩 보셨죠? 네, 바로 제가 만든 벽이에요.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큰 프로젝트를 시도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실 텐데요, 지금부터 제가 클라이밍을 진심으로 즐기기 위해 만들어 온 과정들을 이야기 해드릴게요. 내가 진심으로 즐기고 싶었던 운동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에요. 혹시 여러분은 좋아하는 것을 제대로 즐길 수 없을 때가 있었나요? 저는 클라이밍을 하면서 그것을 조금씩 느꼈어요. 4년 동안 클라이밍을 꾸준히 다녔지만 처음 클라이밍을 접했을 때의 그 열정을 계속 유지하기는 힘들었죠. 제가 클라이밍을 처음 시작한 것은 4년 전이예요. 6학년 때 하기로 한 클라이밍 체험을 못 하게 된 게 한이 맺혀서 집 근처 클라이밍장을 다니게 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죠. 클라이밍을 시작하고 처음 수업을 들었을 때 선생님도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고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높은 난도를 금방금방 쉽게 풀어내면서 ‘아!! 이 운동은 오래 하겠다’ 라는 감이 딱 왔거든요. 도전 과제마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았고, 각자의 장점과 방식을 이용해서 풀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그 점이 자신감을 불어 넣어 줘서 실력이 느는 속도를 더 붙여 주었죠. 하지만 클라이밍을 시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운동하는 시간에 비례해 실력이 함께 늘지 않고 정체기가 오는 것을 느꼈어요. 금산간디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같이 수업을 듣는 또래 친구들과 같은 시간대에 만나서 놀고 헤어지는 걸 반복해서 클라이밍장을 갈 때마다 어색할 일이 없었죠. 그런데 금산간디에 들어오고 난 이후부터는 클라이밍장을 갈 시간이 없다 보니 같이 할 사람이 없어졌어요. 주말에 가끔 가거나 방학에만 회원권을 끊어서 다녔는데 예전에 같이 놀던 애들은 전부 학원다니느라 잘 나오는 일이 없었고, 갈 때마다 어색한 사람들과 수업을 듣다 보니 같이 재밌게 수업하기보다는 남들의 클라이밍 실력을 자꾸 의식하기 시작했어요. 처음 초보자로 클라이밍을 시작했을 때는 문제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것도 늘 새로웠고 누가 잘하든 못하든 다 같이 고민도 해 보면서 문제를 풀었는데 자주 나오지 않으니까 문제보다 문제를 푸는 사람을 먼저 보게 되었어요. 그만큼 제가 느끼는 주변 시선들도 점점 많아졌고, 이런 방식으로 클라이밍장을 다니다 보니 흥미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혼자서 운동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는 시점이었죠. 그러다 어느 날, 친구랑 함께 클라이밍장을 다녀왔어요. 평소 편하게 지내던 친구와 같이 클라이밍을 하니 주변의 시선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제 취미를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순수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죠. 그래서 제가 정말 좋아하고, 또 잘하고 싶어 하는 운동을 주변 사람들과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올라왔어요. 제가 진심으로 즐기는 방법으로 모두와 같은 마음을 느끼고 싶었죠. 더 나아가서 아예 학교에 클라이밍 벽을 만들어서 친구나 후배들과 같이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클라이밍은 몸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벽을 만들어서 제대로 된 클라이밍 문화를 자리 잡게 하고 싶었죠. 그 바람은 곧 1년간의 장기 프로젝트가 되었어요. 무모하기도 한 도전이었지만 다 같이 클라이밍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힘차게 시작한 프로젝트였죠. 등산학교에서의 인연 벽을 만드는 작업을 설명하기 이전에 제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큰 동력을 불어넣어 준 경험을 하나 소개할게요. 바로 방학에 다녀온 코오롱등산학교예요. 6박 7일 동안 산 위의 깎아지른 바위를 등반하는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많은 배움을 얻었고 많은 인연을 맺었어요. 바위를 오르는 동안 의지하고 매달릴 줄을 묶는 매듭법, 먼저 올라가는 선등자와 뒤따라 올라가는 후등자 간의 신호법, 중간중간 쉬는 포인트에서 안전하게 쉬고 다시 올라가기 위해 준비하는 방법 등 안전을 위한 기술을 배웠어요. 모두 처음 해 보는 생소한 기술들이었지만 매일 벽을 타면서 기술을 몸에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이 정말 새롭고 재미있었기에 깊게 몰입할 수 있었어요. 높은 산에서 진행하는 만큼 낙석 같은 위험한 변수도 많았고, 등반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이 낯설기도 했지만 이런 점들은 같이 등반하는 사람들과의 동질감을 단시간에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어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같은 목표를 보고 오른다는 것에서 클라이밍이 팀 스포츠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소속감과 동질감을 많이 느꼈고요. 어색한 공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벽을 타는 건데도 혼자 했던 예전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어요. 혼자 허허벌판을 돌아다니다가 마을을 찾은 느낌이랄까요. 바위를 오르다 보면 가장 많이 듣고, 또 외치는 말이 있었어요. 먼저 올라간 선등자가 줄을 당겨주면서 바위를 올라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하늘을 보고 ‘줄당겨’라고 하면 위에서 듣고 줄을 당길 수 있었어요. 그래서 발 딛는 자리가 불안하거나 손을 놓치기 직전이라면 너나 할 거 없이 ‘줄당겨! 줄당겨!!’하고 다급하게 외치게 되어서 꽤 진풍경이 펼쳐졌죠. 이제 왜 사람들이 다 같이 산에 다니고 함께 클라이밍을 하러 가는지 깊이 실감할 수 있는 경험이었어요. 산에 다니는 사람들의 공통점인지 모르겠는데, 등산학교 사람들 모두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느새 인연이 되어 있었어요. 같은 팀원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분들과 같은 방을 함께 썼던 분들, 그리고 강사님들까지 연락처를 교환하고 서로 아쉬워하며 다음 등산학교 때 보자는 말을 남겼어요. 전 솔직히 이렇게 깊이 몰입하더라도 다시 집으로 오면 금방 잊힐 줄 알았는데 어느새, 제가 먼저 다시 만나고 싶었던 강사님에게 같이 산에 가자고 연락하고 있었죠. 그렇게 새삼 인연을 이어가는 것이 이렇게 반가운 일인지 몰랐어요. 어떤 선생님은 나중에 직장을 다니게 되더라도 산에 가게 되면 꼭 연락해달라는 말도 해주셨고 등산학교를 주최한 코오롱에서도 인터뷰를 요청해 주셨죠. 제가 보고 느끼던 클라이밍에서의 세상이 한층 넓어졌다는 것을 오래 여운이 남도록 느낄 수 있었어요. 사람들과 함께하는 작업 등산학교를 다녀온 뒤 방학부터는 벽을 만들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어요.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합판을 전부 붙인 뒤에는 얼추 벽의 모양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저는 벌써 완성된 것 같은 겉모양에 신나서 바로 홀드 몇 개를 합판에 붙여 봤어요. 매달려 보니 클라이밍장에서 홀드를 잡고 매달릴 때와 똑같은 그립감에 저는 환호를 질렀어요. 먼 길을 달리고 있는 도중에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죠. 이제 드디어 학교에서도 클라이밍을 다 같이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 되니 텐션이 올라갔어요. 그래서 한동안 흥분한 상태로 매달려 있다가 다른 홀드도 붙여 보고 하면서 한동안 들떠 있었어요. 그동안 작업 중간에 힘 빠지는 시간이 있기도 했지만 벽이 완성되어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게 위로되는 느낌이었죠. 클라이밍이 단순히 혼자 잘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닌 함께할 때 진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어요. 만들어지는 학교 문화 벽을 만드는 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면 클라이밍 문화를 학교에 스며들게 하는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어요.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수업을 개설하고 목요일 동아리에도 클라이밍 동아리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많이 해야 했죠. 학생 개설 수업은 그런 제 활동의 중심이 되는 활동이었어요. 예준이와 함께 복싱과 클라이밍 수업 ‘오르락 때리락’을 열기로 하고 수업을 준비했어요. 수업할 때 서로의 수업을 보조 해주고, 앞으로 6차시 동안 진행할 수업의 세부 계획을 함께 짰어요. 학습분기가 시작된 뒤 수요일 건강교과에서 바로 첫 수업을 진행했어요. 3학년 교실에 모여 그날 할 수업 내용을 알려주고 예준이의 복싱 수업을 먼저 보조교사로 같이 진행했어요. 복싱 수업이 순조롭게 끝난 뒤로는 쉬는 시간을 가지고 바로 제 수업을 진행했죠. 먼저 클라이밍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인 삼지점을 알려주고 쉬운 문제를 중심으로 레벨테스트를 했어요. 특히 삼지점은 다른 동작으로 나아갈 때도 잘 활용해야 해서 한 번씩 삼지점을 이용한 문제를 풀어본 뒤에 자유롭게 문제를 풀게 했어요. 한 명씩 벽에 붙어서 문제를 풀면 제가 뒤에서 자세를 봐주는 방식으로 쭉 진행했어요. 중간중간 긴 문제인 지구력 문제도 만들어 주면서 각자 난이도에 맞게 문제를 풀었어요. 애들한테 잘 설명하다가 저도 잘 모르겠어서 막히는 부분도 가끔 있었지만 대부분 잘 알아들어 주었고 재밌게 수업이 진행됐어요. 수업계획서를 쓸 때만 해도 제가 직접 수업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실감이 잘 나지 않았는데 막상 수업을 진행해 보니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동안 줄곧 저 혼자만 진심이었던 클라이밍에 다른 사람도 점점 진심이 되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었죠. 쉬는 시간 틈틈이, 심지어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밤에도 열정적으로 벽을 타는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또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제 수업을 들은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배운 것을 가르쳐 주는 등 문화가 형성되는 것도 많이 보였고 덕분에 절로 뿌듯함이 들었어요. 벽이 완성되고 문제를 몇 개 만들어 놓자마자 와서 문제를 풀어보는 애들이 많았던 만큼 이미 클라이밍에 감을 잡은 친구들도 많이 있었어요. 쉬는 시간마다 벽에 모여서 이것저것 해 보고 벽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며 벌써 목표가 이루어진 것 같아서 저도 계속 들떴고요. 점심을 먹고 벽으로 가보면 항상 애들이 있었고, 저도 신나서 암벽화를 가지고 애들한테 달려갔어요. 문제 푸는 법을 알려주다가 수업에서 진행할 내용을 먼저 알려주기도 하면서 제가 설치한 벽이 만든 변화를 기쁘게 느꼈어요. 내가 주는 영향들 저는 서로 간의 갈등으로 관계를 외면하고 싶더라도 공동체 속에서 느끼는 것에 이끌려 금방 돌아오고 마는 사람이에요. 그만큼 예민하게 느끼는 것도 많았고 아쉬운 소리를 하기 힘들어하기도 하죠. 얼마 전까지는 제가 이뤄낸 것들의 주축이 저라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벽을 만들고 수업과 동아리를 진행하면서 제가 주변에서 받은 영향만큼 제가 주는 영향도 얼마나 컸는지 체감할 수 있었어요. 벽을 만들기 위해 도움을 주신 많은 선생님과 친구들, 그리고 벽이 완성되자마자 찾아와서 벽을 탔던 친구들과 제가 연 수업에 들어와 준 친구들까지 넘치는 관심을 받으며 깨달은 것이었어요. 많은 깨달음 중에서 가장 기쁜 점은 어떤 것이 되었든 제가 한 만큼의 보답이 저에게 돌아왔다는 것이에요. 3년 동안 제게 많은 안정을 준 것은 저희의 공동체였기에 더 좋게 만들고 싶었고, 더 오랫동안 따듯했으면 했어요. 그 바람이 무의식적으로든 의식적으로든 공동체에 더 열정을 기울이게 만들었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보답 덕분에 저는 다시 무엇이든 할 힘이 생겨나요.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자신을 발견하게 하고 주변 사람들과 연결되는 동시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참 신기한 것 같아요. 하나의 취미로 끝날 수 있었던 이 운동을 논문으로 거쳐서 저에게 중요한 변화를 만들어 내었으니까요. 논문 작업을 하면서 힘들고 싫을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변화한 만큼 앞으로도 도움이 될 밑거름을 남겨둔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더 많이 들어요. 그동안 했던 작업의 마무리도 잘 되어가고 있는 만큼 이제는 벽이 단지 물리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앞으로도 여전히 사람과 사람을 이을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에요.
더에듀 전영진 기자 | 내년 시행을 앞둔 학생맞춤통합지원법(학맞통)의 원점 재검토 요구가 나왔다. 탁상행정의 절정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학맞통은 경제적 빈곤이나 기초학력 미달 등 복합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조기에 발굴하고 지원하려는 목적에서 올해 국회를 통과해 내년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세부 사항 준비 과정에서 교사를 교육자가 아닌 복지 조사관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교사에게 학생의 가정환경과 경제상황을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복합적 위기라는 표현도 문제로 제기됐다. 객관적 지표 없이 한정된 예산으로 대상자를 선정해야 하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 이는 교육부가 그간 추진한 학생에 대한 편견과 낙은 효과 방지 원칙과도 정면으로 배치한다. 교육부는 대표적으로 2013년 가정환경조사를 폐지하는 등 민감 정보 접근을 엄격히 제한해 왔다. 충북교사노조는 “교사가 학생들의 불행을 저울질하고 판단해야 해 민원의 최전선에 서게 될 수밖에 없다”며 “교육 공동체의 신뢰는 무너지고 학교는 갈등의 장으로 변질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교육부는 맞춤형 지원이라는 미명 하에 교사에게 학생의 가난과 불행을 캐내라고 강요한다”며 “지원을 빌미로 학생을 선별하고 낙인찍는 행태이다.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위법한 가이드라인과 시행령 즉각 폐기 ▲학맞통 시행 전면 유보 및 원점 재검토 ▲아동복지법 및 아동학대처벌법 개정을 요구했다. 한펴, 초등교사노조(초등노조)가 지난 11~15일 초등교사 882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학생맞춤통합지원’ 긴급 설문조사 결과, 운영 과정에서 △교사의 행정 책임 및 비본질업무 증가를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았다. 제도 개선을 위해선 △학교 역할은 의뢰에 한정하고 지역 학맞통 지원 센터 중심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
더에듀 |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2일 교육부 정부 보고에서 서울대학교와 지방국립대의 정부 예산 격차를 지적하며 “산업화 시대에는 자원이 없으니 큰아들에 ‘몰빵’을 했다. 자원이 없으니 할 수 없이 한 군데 몰빵했지만 지금까지 그러고 있는 건 너무 잔인한 일 아닌가”라고 말했다. 국립서울대학교에 대한 국가지원이 다른 지방대학들보다 근 3배나 많은 점을 지적하며 그 부당성을 비판한 것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후련한 말이다. 1인당 학생지원비가 연간 6000여만원과 2000여만원의 차이가 나는 사실을 교육부는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아마도 관행으로 굳어져 왔기에 문제의식이 마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더 환영할 만한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차별적인 지원을 어느 누구도 지적할 수 없다는 현실 속에서 대통령이 입을 연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대통령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공개된 장소에서 지적할 수 없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는 교육기관이기 이전에 이미 권력이 되었고 학벌이 되었다. 장관급 고위공직자 중 약 60%, 국회의원 중 약 40%, 전체 검사의 약 60%, 전체 4년제 대학교수의 약 30%, 전국규모의 7대 일간지 전체기고자의 약 50%를 서울대 출신이 차지한다. 그런 위상을 가진 대학에 누가 어떻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대통령은 그런 대학에 대한 국가 지원에 대해 날 선 지적을 했다.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울대라는 교육기관과 정치권력이 과거의 문벌처럼 그리고 얼마 전의 군벌처럼 강고하게 얽혀있는 권력의 담지자(擔持者)이기 때문이다. 공고화하는 대학 서열 체제와 그것을 뒷받침한 국가의 편향 지원 문제가 수면 위로 올랐다. 대통령의 지적 전에 교육부장관이, 국회의원이, 논평가들이 이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말을 하지 않은 우리 사회가 불행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설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 것은 개혁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대통령만이 우리나라 교육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을 현실화한 것은 더욱 안타깝지만 공론화한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특정 학벌이 이끌어가는 불행하고 불의하고 불안한 사회를 끝낼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더에듀 | 학교는 왜 가야 하는가. 이 짧은 질문은 늘 우리 교육의 뿌리를 건드린다. 아이들은 주저 없이 “공부하려고요”라고 말하지만, 그 대답은 언제나 절반만 빛난다. 학교는 성적을 쌓는 곳이기 전에 ‘사람을 빚는 곳’이다. 꽃이 피기 위해 뿌리가 먼저 자리 잡아야 하듯, 배움도 태도가 먼저 자라야 한다. 오늘의 문제는 지식이 과도해지고 태도가 가벼워졌다는 데 있다. 점수는 높아지는데 말투는 거칠고, 성적은 오르는데 책임감은 낮다.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결함이 용서되는 분위기 속에서 “얘는 성적이 좋으니까”라는 말이 어느새 면죄부처럼 쓰인다. 이는 가정과 학교가 함께 만들어 낸 왜곡된 신호이며, 아이들에게는 위험한 착시이다. 실태는 더 선명하다. 수학을 잘 풀어도 수업 중에 상대 말을 끊는 아이가 있고, 글짓기를 잘해도 친구 의견을 비웃는 아이가 있다. 지식만 자라면 언어는 칼이 되기도 하고, 논리는 타인을 꺾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세상은 그런 아이에게 “스펙은 뛰어나나 함께 일하기 어렵다”는 냉정한 평가를 내린다. 문제집은 해결했지만 사람 문제에서는 오답을 낸 셈이다. 통계도 이 현상을 뒷받침한다. 교육부 조사에 따르면 교사 10명 중 7명은 “학업 능력보다 기본 생활 태도 부족이 학교생활 문제의 주된 원인”이라고 답했다. 또 한 청소년 패널 조사에서는 ‘성적 부담’보다 ‘또래 관계 스트레스’가 학생 행복도를 더 크게 떨어뜨린다고 나타났다. 성적 중심 경쟁은 지식을 키웠지만, 관계와 태도에서는 허약해진 아이를 남겼다. 이제 필요한 것은 관점을 전환하는 일이다. 문제 푸는 법만 가르치는 교실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사는 법을 함께 배우는 교실을 만드는 것이다. 인사하는 습관, 경청하는 태도, 배려하는 마음, 규칙을 지키는 의지 같은 기본은 학습 능력을 떠받치는 기초 체력이다.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고전적 가르침처럼, 몸가짐이 단정해야 배움이 뿌리를 내린다. 현장에서 교사의 역할도 다시 세워야 한다. 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교사의 말보다 태도를 더 본다. 칼릴 지브란은 “아이들은 당신의 품이 아니라 시간을 향해 달려가는 화살”이라 했다. 화살이 곧게 날아가려면 활을 당기는 손이 먼저 안정되어야 한다. 교사의 태도는 그 활의 긴장과 같다. 교실 변화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책상을 스스로 정돈하고, 친구가 말할 때 눈을 맞추고, 잘못하면 인정하고, 약속은 지키려 애쓰는 아이는 배움의 토대를 단단히 갖춘 아이다. 이런 태도는 교사가 일상 속에서 조용히 보여주는 본보기와 일관된 메시지 속에서 자란다. 아이의 인격은 지식보다 천천히 자라지만, 자란 뒤에는 더 멀리 간다. 우리가 만들 교실의 미래는 결국 선택의 문제이다. 점수를 우선하는 교실을 택할 것인가, 사람됨을 함께 세우는 교실을 택할 것인가. 교육은 언제나 두 길의 기로에 서 있다. 그러나 한쪽만 선택할 필요는 없다. 태도가 뿌리를 만들고, 지식이 가지를 확장하며, 둘이 조화를 이룰 때 아이는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된다. 결국 배움의 본질은 ‘사람됨’에서 시작한다. 교실이 아이의 인격을 세워주고, 지식은 그 위에서 더 큰 세상을 향해 자라난다. 우리 교육이 다시 질문해야 할 단 하나의 문장은 이것이다. 오늘의 교실은 아이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더에듀 전영진 기자 | 김석준 부산교육감이 교육감직 상실형을 선고 받았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해직 교사 4명의 특별 채용 부당 지시 혐의가 인정됐다. 부산지법 형사3단독 심재남 부장판사는 지난 12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행 혐의로 기소된 김 교육감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교육감직은 상실된다. 김 교육감은 지난 2018년 부산교육감으로 재직하며 전교조 통일학교 해직교사 4명을 특별 채용 대상자로 내정한 뒤 인사 담당 공무원들에게 공개경쟁 채용으로 가장해 특별 채용하도록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채용자 내정 후 공개경쟁 방식으로 위장해 채용한 것. 채용된 4명의 해직교사들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09년 해직됐으며, 2013년 집행유예가 확정됐다. 이들은 2005년 전교조 부산지부에 통일학교를 개설하고 김일성과 공산당을 찬양하는 내용의 강의를 한 혐의를 받았다. 김 교육감은 재판부에 전교조 통일학교 해직교사 4명만을 위한 특혜 채용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김 교육감이 임용권을 남용해 실무자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는 등 부당한 영향을 주는 행위를 했다고 인정했다. 구체적으로 지원자 4명 중 단 1명의 탈락자도 없이 모두 합격한 것을 두고 경쟁시험을 통한 공개 전형에 해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사익을 위함을 아닌 것으로 보인 점은 참작했다. 앞서 검찰은 징역 2년을 구형했다. 김 교육감은 1심 판결 직후 취재진을 만나 적법 절차에 따른 채용이었음을 강조하며 항소심에서 다투겠다고 불복의 뜻을 밝혔다.
더에듀 전영진 기자 | 내년 6월 진행될 경남교육감 선거에 나설 보수·중도 성향 후보가 4명으로 압축됐다. 단일화 밖에는 4선의 국회의원 출신 이군현 출마자가 버티고 있어 추후 분열과 통합의 방향성에 주목된다. 경남교육감 후보 단일화 연대는 지난 12일 창원컨벤션센터에서 1차 여론조사 통과자 권순기 전 경상국립대 총장, 김상권 전 경남교육청 교육국장, 김영곤 전 교육부 차관보, 최병헌 전 경남교육청 학교정책국장 등 4명을 발표했다. 권진택 전 경남과기대 총장과 김승오 전 청와대 교육행정관, 최해범 전 창원대 총장은 1차 관문을 넘지 못했다. 이번 단일화는 여론조사 기관 2곳이 지난 10~11일 이틀간 경남지역 만 18세 이상 도만 255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 평균값을 반영한 것이다. 단일화 연대는 후보별 순위와 지지율은 공개하지 않았다. 1차 관문을 통과한 4명을 대상으로 2차 여론조사를 진행, 최종 후보를 결정할 예정이지만, 4선 국회의원 출신 이군현 출마자가 단일화 과정을 이탈한 상태라 추후 추가 단일화 진행 여부가 관건이다. 이 출마자는 지난 8일 기자회견을 열고 토론회도 없이 진행하는 여론조사 방식의 단일화는 깜깜이라며 후보 간 교육철학과 정책, 도덕성과 청렴성, 교육행정 능력 검증을 위한 토론회 선행을 주장했다. 그러나 단일화 연대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결국 단일화 과정에서 이탈한 상태이다.
더에듀 지성배 기자 | 김희정 경기 정현고등학교 국어교사(전 경기교사노조 대변인)가 중등교사노조 제7대 위원장에 당선됐다. 러닝메이트인 수석부위원장엔 이정열 부산 정관고 역사교사(전 부산교사노조 대변인)가 함께 한다. 임기는 내년 3월 1일부터 3년이다. 중등교사노조는 지난 10~13일 오후 6시까지 제7대 위원장 선거 투표를 진행했으며, 이날 투표 종료 후 바로 이 같은 결과를 발표했다. 투표율 55.12%에 득표율 52.36%로 기호 1번 원주현·강성 후보를 따돌렸다. 이 위원장 당선인은 ‘중등교사의 자부심, 전국중등교사노조의 새로운 리더’를 비전으로 ▲교사 안전·교권 강화 ▲교사 근무환경 혁신 ▲교육과정·대입 제도 개선 ▲조합원 소통 강화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퇴근 후 교사 시간 보장 △교사 대사 성·디지털 폭력 제로 추진 △교사 안전 체험활동 △교사 업무 경감 △수능 감독 처우 △교사 평가 자율권 보장 △고교학점제 폐지 및 2022 개정 교육과정 개편 △대입제도 개선 △조합원의 노동조합 시스템화 등을 담았다. 김희정 당선인은 “투명한, 조합원 중심 조합을 만들겠다”며 “특히 중등교사의 노동 값어치가 인정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당선인 약력 - 김희정 제7대 중등교사노조 위원장 경기 정현고 국어교사 경기교사노조 대변인(2024~2025) 교사노조연맹 고교학점제 TF 팀장(2025) 교육부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개선 협의회 참여920250 경기교사노조 중등정책TF 팀장(2023) - 이정열 제7대 중등교사노조 수석부위원장 부산 정관고 역사교사 부산교사노조 중등부위원장 겸 대변인(2023~2025) 전국중등교사노조 자문단(2025) 부산교육청 학력평가지원단(2022~2025) 부산교육청 역사교육지원단(2023~2025)
더에듀 | 행복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외부 조건을 먼저 떠올린다. 돈이 많고, 잘 생기고, 좋은 직장과 지위, 넓은 집과 멋진 차를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지금 내가 그 위치에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여기고, 언젠가 그 자리에 오르면 평생 행복할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바로 그 믿음이 행복하지 못한 삶의 시작이자 끝이다. 행복은 자판기처럼 외부 조건을 넣으면 자동으로 나오는 단순한 공식이 아니다. 사람마다 기질이 다르고 살아온 삶의 궤적이 다르기에, 일괄적으로 적용되는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60년 가까이 살아오며 깨달은 것은, 행복에는 특정한 기준점이나 도달점이 없다는 사실이다. 행복을 어떤 목표에 도달했는지 여부로 평가하거나 구분하는 것은 지나치게 어렵고, 때로는 무의미하다. 그 대신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기질과 삶에 대한 가치관, 태도와의 조화이다. 그것이 맞아떨어질 때 행복할 확률이 높아진다. 동화 속 인물 흥부와 놀부를 떠올려 보자. 흥부는 착한 기질을 지녔기에 돈 욕심이나 남 위에 서려는 마음이 없다. 그에게 행복은 가족과 함께 소박하게 살아가는 데 있다.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로 금은보화가 쏟아져도, 그것이 오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오순도순 살아가는 일상이 더 큰 행복일 수 있다. 반면 놀부는 욕심이 많고 권세를 누리기를 좋아한다. 그에게 전 재산을 잃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이다. 놀부가 마음을 고쳐먹고 욕심을 버리는 일은 잠시 흉내 낼 수 있을지 몰라도, 오래 지속되는 행복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놀부다운 행복은 올바른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그 권세를 누리는 데 있다. 즉, 흥부와 놀부의 행복은 서로 다르며, 각자의 기질과 가치관에 맞는 방식으로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와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내 기질과 삶에 맞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진짜 해결책이며, 행복의 열쇠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비교할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거나 따라갈 필요 없이, 내 삶에 집중하고 나다움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행복은 남이 정해주는 기준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옷을 입는 것과 같다. 남의 옷을 억지로 걸치면 불편하고 어색하지만, 내 몸에 맞는 옷을 입으면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맞는 행복을 찾고, 그것을 매일매일 누리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행복의 이유이다.
더에듀 | 학창시절을 돌아보자. 교실은 늘 새로운 구성원으로 채워졌고, 그곳에서 다양한 역사가 만들어져 왔으며, 어른이 된 오늘도 그 시간을 그리워한다. 한 가지 색이 아닌 셀 수 없는 무수한 빛깔로 가득 찬 곳에서 수없이 많은 꿈을 꿀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더에듀>는 ‘꿈몽글 교사들’과 함께 교실에 펼쳐진 다양한 색을 찾아가는 여정 ‘오늘의 교실’을 시작한다. 교실은 그때도, 지금도, 내일도 살아있다는 것만 기억하자. 학교는 어떤 공간일까요? 학교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할까요? 이 질문에는 다양한 답변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표현이 이루어지든 간에 그 중심에는 ‘교육’이 빠져서는 안 되겠지요.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학교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교육’이 빠져있는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학교에는 배움이 있어야 하고, 가르침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통해 성장의 경험이 학생들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배움과 가르침, 성장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학교는 원활히 굴러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즘 이러한 대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얽혀있는 복잡한 정치적 역학 관계 그리고 경제적 논리가 교육이라는 단어를 말끔히 지우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또 그 기저에 깔린 다양한 이유로 이러한 문제를 교육 종사자들은 분명하게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거기에서 자유롭진 못하지요. 교육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학교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을 솔직하게 다뤄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학교를 두고 일각에서 제기하는 문제점들을 훑어보며, 사회에서는 어떤 원리로 학교를 문제투성이로 생각하는지 가늠해 보고자 합니다. 교육 관련 이슈에 올라온 누리꾼들의 댓글을 중심으로 이 내용을 다뤄보겠습니다. “공부만 강요해서 아이들의 사고를 억압하는 공간이 학교야” 정말 자주 보이는 표현이지요. 아마 이런 댓글을 다시는 분들은 학교를 다닌 시점이 몇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런 연령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교육과정이 그새 많이 바뀌었거든요. 교육 철학과 이념도 끊임없이 변화했고요. 요새 아이들은 스스로 ‘학교 다닐 때가 좋았다’고 말합니다. 세상 행복했다고요. 다들 매번 뉴스에 나오는 자극적인 타이틀 위주로 학원 수십 개 다니는 아이들에게 주목해서 그렇지. 안 그래도 이어서 이런 댓글들이 보이네요. ‘요새 아이들은 공부를 너무 안 해서 문제.’ 어휘력이 떨어진다느니, 기본적인 상식이 부족하다느니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어린 세대를 향한 부정적 평가들이 보입니다. 아까는 너무 공부만 해서 문제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공부를 많이 시킨다는 주장 자체가 정말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인지, 검증이 필요합니다. 지필 시험의 영향도 많이 낮아진 요즘이기에, 학교가 주입식 유형의 공부만을 강요했다고 볼 수 있는지는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프로젝트 학습이나, 다채로운 활동들이 부쩍 늘어난 요즘이라서요. 좀 더 터놓고 말하면, 어떤 과목에서 성취 수준이 매우 낮은 학생도 미흡하다고 평가를 할 수 없는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의 실태를 세상이 알고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잘하지 못하는 것을 잘하지 못한다고 있는 그대로 서술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하고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공부를 많이 하면 아이들의 사고가 억압되는 가’ 하는 부분도 아리송한 대목입니다. 다양한 지식을 갖출수록 더욱 창의성을 폭넓게 발현할 수 있다는 진실을 외면하는, 어쩌면 ‘무질서함이 곧 창의성’이라고 곡해하는 사상이 기저에 깔린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드는 부분이거든요. 그래요. 저 문장은 요로 봐도, 모로 봐도, 참 알쏭달쏭한 문장입니다. “진정한 스승은 옛말이다! 요새 교사들은 그저 직장인 아니냐” 일단 교사가 직장인이면 안 되는지도 깊은 논의가 필요합니다만, 급한 대로 저 발언을 하신 분의 마음을 존중하며 진정한 스승의 의미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같은 그 시대, 그러니까 과거의 학교를 다르게 기억하는 분들이 있어서요. 오, 찾았다. 이 댓글을 읽어볼까요? ‘예전 교사들이 교사냐. 애들 맨날 때리고 그랬지.’ 그래요. 예전 교사들에 대한 분노와 분개를 가지신 분들도 참 많아요. 그런 감정은 저도 이해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저도 같은 시대를 겪었으니까요. 교실에서 놀았다는 이유로 당구 큐대나 1m짜리 쇠자 좁은 면으로 두들겨 맞아 허벅지에 피가 철철 난 적도 있고요.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수업 시간 내내 맞았던 사건도 기억나네요. 공부는 그래도 꽤 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참 많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예전 선생님들을 욕하는 분들도 계시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유형의 선생님도 계셨어도 여러 좋은 선생님들도 계셨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어찌 되었든 각자에게 그런 아픈 기억이 있을 수 있는 게 사실이니까요. 제 말은, 그 마음은 이해한다는 거예요. 같은 시대를 겪었으니까요. 사실 그래서 더 교사가 되고 싶었거든요. 여러 좋은 선생님들을 보며 그 점을 닮아가고, 나쁜 선생님들을 만나면 그런 점들 때문에 받은 상처를 제자들에겐 절대 안 주겠다고 다짐하면서요. 그런데도 그 기억을 왜 저희 세대에게 투영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훌쩍. 아무튼 예전이 좋았다는 건가요, 안 좋았다는 건가요? 학교를 비판하시는 분들이 어떤 포지션인지 모를 때가 참 많습니다. 단적인 예가 ‘보충학습’이에요. 요즘도 어떤 열의가 넘치는 선생님들은 국어나 수학 등 주요 교과에 부진 정도가 심한 친구들을 위해 자체적으로 보충학습을 추진하시려고 해요. 저라면 정식 보충학습 시간이 아니면 감히 그렇게 하진 못할 거예요. 그만큼 존경스러운, 그렇게 열정으로 그리고 아이들을 향한 사랑으로 가르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참 슬픈 현실은요. 매번 그 노력을 안 좋아하는 분들이 나타나요. 학생을 위한 부가적인 지도 활동에 불만을 갖고 민원을 넣는 학부모님들이 계시거든요. 왜 우리 아이를 남겨서 기를 죽이니 뭐라느니 다양한 이유를 듭니다. 그저 아이를 위해서, 눈앞의 필수 성취 기준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하는 건데 말이죠. 그 상황에 다음 학년 내용을 예습하는 학원에 가야 하니 시간 낭비하지 말라며, 그냥 우리 아이 집으로 보내달라고 말하시곤 하는데, 그 속에서 온갖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경험을 반복하게 된 교사들은 이제 보충학습을 자체적으로 진행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굳이, 왜?’인 거죠. 교사가 자신의 시간을 써서 아이를 위해 헌신해도,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화를 내시는 분들이 워낙 많아진 요즘이라서요. 이런 모습들은 결국 예전의 교육 방식을 사회에서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불량 학생들을 교사가 직접 제지하고 혼을 내는 방법은 이제 불가능해졌죠. 학교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교사가 이를 막고 혼을 내는 것도 불가능해졌죠. 담임교사가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했더니, 조그마한 사건 사고에도 교사가 모든 책임을 지죠. 심지어는 수업 활동 하나하나에 민원을 넣는 사례들도 꽤 자주 발견됩니다. 교사가 교육에 있어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단순히 학교만의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공공 서비스 여러 영역에서 유사한 문제가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범죄자로부터 시민을 구한 경찰이 되려 처벌을 받는다든지, 사고로부터 시민의 생명을 구한 구급대원이 소송을 당한다든지 말이에요. 이런 문제들이 교육 현장에서는 교실이 진정으로 교육을 실천할 수 없는 공간으로 전락하는 모습으로 발현되는 셈이지요. 특정 직업 종사자가 그 직업에 최선을 다하길 바라면서, 막상 정말로 소명 의식을 바탕으로 본질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을 때 처벌을 해버리고 마는 사회가 과연 유지될 수 있는 구조일까요. 아, 정말 모르겠어요. 이건 아닌데! 예전과 오늘날 교사의 역할에 대한 일대 일 비교가 어려운 상황인데요. 사회에서는 교사들에게 옛날 스승의 역할을 기대하면서 실상은 모든 권한이 제한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교사는 모든 부분에서 책임을 지길 바라면서도 교사로서의 역할은 하지 않길 바랍니다. 교사의 가르침이 기분 나쁘면, 그게 심지어 정상적인 학급 운영이거나 교육과정에 따른 교육 활동이더라도, 각종 민원 공격을 퍼붓는 오늘날입니다. 교육을 바라기보다는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길 바라는 셈입니다. 정말 슬프고도 웃긴 일이지요. 그런 식의 모순된 요구는 교사의 역할을 아주 큰 정도로 흔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학교도 다른 공공 서비스 영역처럼 매우 큰 정도로 흔들리고 있어요. 그게 오늘의 교실이 대면한 크나큰 문제입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소중한데” 어떤 분들은 자기 아이가 실수했을 땐 “어린이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지만, 상대 아이가 잘못했을 땐 “어떻게 아이가 그럴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시기도 해요. 똑같은 아이이고, 똑같은 행위인데, 누가 하면 나쁘고 누가 하면 착한 것이지요. 행위의 주체가 누구와 더 가깝냐에 따라 행동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상황들이 교실에서 참 자주 일어나요. 이때 나타나는 문제가 ‘사소한 일’을 ‘심각한 사건’으로 전환하는 일들이지요. 아이들은 이미 화해하고 친하게 지냄에도 부모님들끼리 다툼이 커져 싸우는 사건들, 아마 많은 학부모님과 학교 관계자들은 귀에 닳도록 자주 들어보셨을 겁니다. “우리 아이는 소중한데”, “이런 일을 겪으면 안 되는데”... 그런 유형의 명분으로 아이들끼리는 진작 마무리된 사안을 심각한 사건으로 격상시키고자 합니다. 솔직히 학교폭력 문제, 진짜 참 어이가 없습니다. 어린 아이들도 학교폭력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117’로 신고하도록 신고를 장려하곤 했지요. 그런 사회적 인식 변화로 별일 아닌 사건에도 심심하면 신고로 넘기는 경우가 많다 보니 경찰분들도 애로사항이 있는 줄로 압니다. 인계되어 접수된 신고는 학교에서 다 사안 처리를 해야 하고요. 우리 아이가 피해를 입은 경우에는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간주해 학교폭력 신고를 강행하는 보호자 분들이 계시기도 합니다. 상식적이라면 부모님이 아이를 달래고 마무리될 아무것도 아닌 사안에 대해서요. 혹시라도 있을 학교폭력 은폐를 막기 위해 어떤 사소한 건이든 정식적으로 학폭 절차를 밟게 모든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습니다. 지금 학교를 욕하는 분들이 어린 시절이라면 ‘이걸 신고한다고?’ 하는 생각이 들 아주 사소한 일들도 죄다 학교폭력 사안으로 처리되고 있는 오늘입니다. 그러면, 학교폭력 신고 건수는 당연히 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학교 밖 사람들은 이걸 보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우리 어린이들이 얼마나 소중한데. 학교폭력 신고 건수가 나날이 늘어나다니. 이거 참 심각한 문제구나! 아주 혼쭐을 내줘야겠어. 아무튼 학교는 참 한심해.” 그 생각으로 온갖 말도 안 되는 대책들을 내놓습니다. 그 대책 속에서 선량한 아이들이 다치고 쓰러지는 경우도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신고가 남발되면서 ‘진짜 학교폭력’ 사건으로서 강력한 처벌이 필요한 경우에도 다른 ‘가짜 학교폭력’ 사건에 어우러지며 정의가 구현되지 못하는 상황도 많고요. 분명히 말하지만, 학교폭력 신고의 의미를 격하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학교폭력 신고로 진짜 바로잡아야 할 학교폭력 사건이 드러나지 못하게 되는 이 악순환이 답답하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 양상은 아까의 주제로 이어집니다. 한 아이가 한 아이를 바보라고 놀린 사안이 발생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아이들은 교사에게 지도받고 고칠 점을 약속한 후 사이좋게 지내고 있어요. 하지만 양쪽 가정의 반응은 사뭇 다릅니다. 우리 아이가 학교폭력 가해자로 지목되면 “뭘 그런 사소한 일로 신고를 하냐”라면서 교사에게 “학교폭력 신고를 왜 막지 않냐”고 비난합니다. 반대로 자신의 아이가 조금만 피해를 입어도 “상대 아이는 강제 전학을 가야 한다”라면서 강력한 처분을 기대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학교는 학교폭력을 은폐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과정에서 교육과 학생은 논의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를 앞세운 어른들의 자존심 싸움만이 오고 갈 뿐이지요. 우리 아이들, 정말 소중합니다. 정말 소중한데, 왜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 소중함이 달라져야 하나요. 자신의 아이만 소중하고, 같은 교실에 있는 다른 아이는 왜 함부로 대해져야 하나요? 그 속에서 착하고 여린 아이들은 다칩니다. 부모님들도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합니다. 교사들도 무너집니다. 학교는 그때도, 지금도, 내일도 그곳에 있다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도, 어떤 이는 언제나 대한민국 학교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말할 거예요. 누군가는 언제나 학교에 결함과 문제가 존재한다고 볼 거예요. 아니, 그렇게 생각되어야만 할 거예요. 사회에 크나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교육 때문이다’라고 외칩니다. 누군가의 잘못이나 실패도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학교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학교가 세상에 이롭지 않고, 도리어 교육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인식되어야만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도 분명 존재합니다. 그 이익을 위해 학교를 집중적으로 깎아내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게 현실인 줄은 압니다. 하지만 전 여기서 분명히 말하고 싶어요.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교육을 꺾지 말아주세요. 학교와 교실에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주인공들을 함부로 평가절하하거나 폄훼하지 말아주세요. 행복하게 서로를 아끼고 보듬으며 성장하는 학생들과 교사들을 공격하지 말아주세요. 그들은 오늘도 교실에서 정말 멋지게 살아가고 있어요. 매 순간 아름다운 시간을 쌓아가고 있어요. 교육을 중심으로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잘 해내고 있어요. 다양한 교육 담론이 펼쳐지고, 그 속에서 다채로운 수업의 장면들이 등장했어요.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더욱 즐거운 교육적 경험을 제공하고자 연구하고 부단히 노력했던, 그런 교육의 르네상스가 분명 존재했어요. 아마 교육 경력이 저랑 비슷하거나 저보다 많은 분은 모두 그 일련의 과정을 함께 보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성장이, 그러니까 학교와 교실이 변화하고 자라나던 시간이 단숨에 무너지고 말았어요. 정말 한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어요. 간절히요. 교실이라는 공간, 정말 괜찮은 곳이에요.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세요. 오늘의 교실을 흔들지 말아주세요. 저는 오늘의 교실을 향한 여정을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떠날 겁니다. <더에듀>와 마련한 ‘오늘의 교실’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려 합니다. 교실에 녹아있는 생각과 거기에 담긴 교육의 의미를 한층 깊게 알려드리려고요. 학생과 교사가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순간들, 오늘의 교실 소개 편은 아래 링크를 통해서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의 교실 0-1화 링크 https://brunch.co.kr/@ggummongle/146 글: 이준기 / 교실과 학교 밖 공간을 잇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합니다. - 그림책 『내 마음 네 마음』, 『민정이의 등굣길』 글 담당 - 장편소설 『학폭교사 위광조』 공저자 - 꿈몽글 팀 글작가 그림: 이예솔 / 따뜻한 시선으로 마음에 닿는 그림을 그리고자 합니다. - 꿈몽글 팀 그림작가 꿈몽글 = 글과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사와 전문 작가들이 힘을 합쳐 학교와 교실 속의 따뜻한 이야기를 기억으로 엮어내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학폭교사 위광조’, ‘내 마음 네 마음’, ‘민정이의 등굣길’ 등이 있다. <더에듀> 연재 ‘오늘의 교실’에는 14인의 교사들이 함께 한다. 교실에서 교육을 실천한 앤솔로지 프로젝트에 참여한 교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