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치적 언어가 점점 거칠어지고, 사회는 빠른 편 가르기에 익숙해지고 있다. 옳고 그름을 숙고하기보다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즉 편 가르기를 먼저 요구받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무엇인가? 답은 의외로 인류의 보고인 오래된 책 즉, 고전 속에 있다. 동서양의 고전은 모두 혼란스러운 시대에 쓰였고, 그 공통의 질문은 하나였다. ‘권력과 인간은 어떻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가’를 규명하고 있다. 먼저 ‘논어’에서 공자는 정치의 출발을 제도나 힘이 아닌 ‘덕’에서 찾는다. “덕으로 다스리면 백성이 부끄러움을 알고 스스로 바르게 된다”(공자 ‘논어 위정편’)는 말은, 교육이 먼저 인간을 형성해야 한다는 믿음을 담고 있다. 이는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한 ‘철인정치’와 맞닿아 있다. 플라톤 역시 정의로운 국가는 지혜와 절제를 갖춘 이들이, 즉 철학자가 통치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두 사상 모두 정치의 타락은 교육의 실패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맹자는 이 논의를 한층 더 급진적으로 밀고 나간다. 그는 “백성이 가장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고 선언하며, 정치의 정당성을 백성의 삶에 둔다고 논했다(맹자 ‘진심장구 하’).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말한 “정치는 공동선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권력은 유지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좋은 삶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동서양은 만난다고 할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시선에서는 차이가 드러난다. 맹자는 성선설을 통해 인간에게 선한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고, 순자는 성악설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악하므로 예와 법, 교육을 통해 교정해야 한다고 보았다(순자 ‘성악편’). 이 대비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와도 닮았다. 플라톤이 이성의 지배를 강조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과 훈련을 통해 덕이 형성된다고 보았다(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이는 교육이 단순한 깨우침이 아니라 반복과 실천의 과정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처럼 동서양의 고전은 서로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공통의 경고를 보낸다. 정의 없는 권력은 폭력이며, 교육 없는 정치는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전은 완성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기준을 세우는 법을 가르친다. ‘무엇이 인간다운가, 어떤 권력이 정당한가, 교육은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학생 스스로 던지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미래 세대에게 고전을 가르친다는 것은 과거의 언어를 외우게 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에 팽배해 있는 극단의 주장 앞에서 멈춰 서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이다. 공자의 덕, 맹자의 존엄, 순자의 규율, 플라톤의 정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은 서로 긴장 속에 있으나, 그 긴장 자체가 민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사유의 균형이라 할 것이다. 혼란의 시대일수록 우리 교육은 더욱 깊어져야 한다. 여기에 진정으로 고전이 필요하다. 고전은 낡은 책이 아니라, 시대를 견디는 질문의 저장고이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고전을 건네는 이유는 그들이 어느 편에 서기 전에 먼저 인간과 사회를 숙고하는 시민으로 성장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교육이 이 역할을 포기하지 않을 때, 혼란의 시대는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교실에 고전 읽기를 생활화해 보자. 요즘은 많은 고전이 청소년들이 읽기 쉽게 편집해 발간해 있다. 이른바 ‘청소년을 위한 고전’, ‘고전은 나의 힘’이라는 책으로 철학 읽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철학은 삶을 사는 지혜의 밑그림이라 할 수 있다. 청소년의 두뇌를 가장 빠르게 성장·발전시킬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철학이다. 고전은 생각하는 힘을 길러준다. 이는 배움과 생각의 인과관계를 밝힌 문장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이 문장은 공자가 배움과 생각의 균형을 강조하며,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깊이 있는 배움은 깊이 있는 생각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공자의 교훈을 잘 나타내고 있다. 2026년에는 우리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고 우리의 교실에 활력을 더하기 위해 고전의 가르침을 생활화하자. 이는 아직도 여전한 주입식 교육과 문제풀이 방식의 수업에 생명력을 더해 줄 것이다. 잠자는 학생이 많은 우리의 교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하고 또 그것이 실질적으로 세상을 사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 온고지신의 지혜와 ‘삶의 힘’을 기르는 고전 읽기가 더욱 소중하게 인식되고 교실의 교육 방식에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더에듀 | 이범 교육평론가가 지난 29일 경향신문에 ‘국가의 귀환’이라는 칼럼을 게재했습니다. 요지는 주주자본주의(주주를 경영의 초점에 두는 미국식 자본주의로 경영의 중심을 주주 가치 극대화에 두며 주주가 직간접적으로 경영에 참여)는 시야가 좁고 국가자본주의(국가가 특정 기업을 직접 관리하면서 각종 경제활동에 국가의 역할을 강화하는 경제제도)로 장기적 시야를 확보하고 경제정책을 수립하라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국가 간의 무력 전쟁에서 총력전을 펴듯, 경제 전쟁에서도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면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으며, 취지에 공감합니다. 특히 인공지능(AI)이나 전기차, 로봇이나 배터리, 바이오 같은 분야에 국가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재명 정부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국가라는 단위에서의 시각입니다. 만일 교회의 발전을 위해 국가가 지원에 나서면 어떻게 될까요. 실제로 국가와 종교가 결합한 적이 있으며 그것을 종교 국가라 했고, 그 시절은 암흑시대로 평가됩니다. 오늘날 종교 국가는 사라졌으며 분리되어 있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은 교회와 마찬가지로 국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두 세계적입니다. 대학만큼은 국가기관으로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과 학문의 발전은 교회처럼 국경을 인정하지 않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대학발전을 위해 대학을 국가기관으로 조직해 운영하고 있는데, 대학 존재 이유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을 국가기관화하고 국가의 목적을 투입한다면 그것은 분명 대학과 학문 발전을 제약할 것입니다. 재정적인 제약과 함께 전체주의 국가들처럼 국가의 이념을 대학에 투입하려 할 것입니다.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었듯이, 국가와 대학이 분리되기를 바랍니다. 이범 님은 대학에 관한 국가경영과 관리가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제가 주장한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무책임화와 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교육 발전을 도모한다는 점은 같지만, 지향하는 목표가 다릅니다. 대학을 교회처럼 국경을 인정하지 않는 조직으로 두고, 제힘으로 땅끝까지 가게 내버려 두었으면 합니다. 지원은 좋습니다. 단, 국가에 의한 조건이나 규제나 통제는 안 됩니다. 대학이 시장에서의 생존법을 스스로 도모하게 하면 어떨까요. 영미 계통의 나라들이 그렇게 했고, 오늘날 그들 나라의 대학들이 세계 학문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더에듀 | 실천교육교사모임은 현장교사들을 주축으로 현장에서 겪는 다양한 교육 문제들을 던져왔다. 이들의 시선에 현재 교육은 어떠한 한계와 가능성을 품고 있을까? 때론 따뜻하게 때론 차갑게 교육현장을 바라보는 실천교육교사모임의 시선을 연재한다. 문제행동을 보인 아이, 어떻게 해야 하나 문제행동을 보인 아이를 보면 우리는 아주 따끔한 벌을 주고 싶습니다. 따끔한 벌을 주면 어쨌든 문제행동을 멈추니깐요. 저는 벌이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아이들은 벌을 받고 싶지 않아서라도 문제행동을 일시적이나마 멈춥니다. 이건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벌'을 받고 싶지 않아 법을 지키고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해도 아무런 불이익도 없는 사회와 교실보다는, 벌과 엄격한 규율이 있는 사회와 교실이 저는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까지 부정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학교라는 공간은 일반적인 사회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라는 공간은 어쨌든 교육을 하는 공간이니까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학교, 교실에서 벌이 행해지는 방식은 ‘교육적인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교실에서 벌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럼 벌 대신 뭘 해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참고로, 과거에 교실에서 이루어져 왔던 대표적인 벌에는, 바로 ‘체벌’이 있었죠. 솔직히 체벌의 문제점에 대해서 굳이 얘기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이건 그냥 폭력입니다. 누군가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건 안 되는 일입니다. 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운동장 뛰기, 이게 뭐가 문제지? 일단 정의를 조금 명확히 하겠습니다. 지금 얘기하고 있는 ‘벌’은 시스템으로서 학생에게 가해지는 벌, 즉 ‘징계’와는 다른 얘깁니다. 교사가 교실에서 문제행동을 보인 아이에게 나름의 판단으로 행하는 제재를 의미합니다. 신규 2년차 때 일입니다. 지지리도 말을 안 듣던 두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두 학생은 말도 안 듣는데, 둘이 허구헌 날 싸워댔습니다. 아무리 혼내고 다그쳐도 그때뿐, 수업 시간에는 집중도 안 하고 둘은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이렇게 맨날 싸워대는 둘을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싶어 전체 반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녀석 둘을 어떻게 하면 좋겠니.” 아이들은 이것저것 얘기했습니다. 엉덩이로 이름쓰기 같은 것들, 아직 3학년인 아이들에게 나올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아이들에게 콕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나 봅니다. 바로 ‘운동장 뛰기!’ 가장 많은 아이가 골랐던, 이 두 녀석들을 위한 일종의 ‘벌’이었습니다. 스무 바퀴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사자 아이들한테도 물었더니 괜찮다고 합니다. 수업 끝나고 그 아이들은 함께 운동장을 뛰었고, 나머지 애들은 키득이면서 그 뛰는 걸 구경했습니다. 보니 스무 바퀴까지 뛰는 건 무리겠다 싶어 제가 중간에 열 바퀴로 줄였습니다. 열 바퀴를 다 뛴 두 아이들은 헉헉댔습니다. 그 둘은 땀 흘리며 같이 뛴 게 나름 좋았던지 같이 사이좋게 집에 갔습니다. 나쁘지 않은 모습 같았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부끄러운 과거가 또 있나 싶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그때는 이게 뭐가 문젠가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이들과 함께 정했고, 당사자 아이들도 받아들였고, 그렇게까지 비극적인 결말(?) 없이 잘 뛰고 잘 갔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일단 학생을 ‘존중하는(Respectful)’ 방식이 아닙니다. 신체를 고통스럽게 하는 벌은 전근대적입니다. 이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이들도 받아들였고 잘 뛰었고 별 탈 없지 않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운동장 벌’을 과연 이 아이들 말고 다른 아이들한테도 일반화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약간의 주저함이 생겨납니다. 이 아이들이 다음에 또 말을 안 들으면 운동장 도는 횟수를 늘려야 할까요? 늘리고 늘려 이 아이들이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만큼 힘들게 해야 이 벌을 효과적으로 쓰는 걸까요? 다음으로 아이의 잘못과 이 벌은 ‘연관성(Related)’이 없습니다. 아이 둘이 말을 안 듣고 다툰 것과 운동장 달리기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요? 예컨대 육상부 아이가 연습에 늦어서 연습 참여에 그만큼 못했다고 합시다. 이 육상부 아이를 육상부 감독이 남겨서 운동장을 뛰게 한 건 이해가 갑니다. 달리기 연습에 늦어 더 달리게 한 건 서로 연관이 있잖아요. 그렇지만 아이가 말을 안 들은 것과 운동장 뛰는 것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거죠. 이 벌이 ‘합리적(Reasonable)’인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운동장 스무 바퀴는 아이들이 견디기에 충분한 강도인가요? 중간에 제가 열 바퀴로 줄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따지고 보면 열 바퀴도 적절한 수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이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Helpful)’ 방식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뛰는 게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이들이 말도 잘 듣고 서로 안 싸우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까요? 예상하겠지만 이 두 아이들은 여전히 말을 안 들었고, 여전히 계속 싸웠습니다. 애초에 이 운동장 벌은 아이들을 힘들게 해서, 다음부터 너희들이 또 말을 안 들으면 이렇게 힘들게 할 거라는 제 마음속 가학적 심보 속에서 출발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문제행동을 멈추게 하려는 속셈만 있었지, 진정으로 이게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방식인지는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설사 이 운동장 벌 이후에 문제행동을 멈췄다 하더라도, 그건 진정으로 이 운동장 벌이 본인들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힘들어서 그런 거였을 겁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격입니다. 이 아이들은 이 ‘운동장 벌’이 할만했다면 문제행동을 굳이 고치지 않을 겁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문제행동을 계속 보였을 테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제 부끄러운 과거를 비판한 잣대는 4가지였습니다. 존중하는 방식인지(Respectful), 서로 연관성이 있는지(Related), 합리적인지(Reasonable), 도움이 되는 방식인지(Helpful). 이 네 가지 잣대는 학급긍정훈육법(PDC)에서 흔히 3R1H라는 이름으로 다루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 네 가지를 따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 중요한 잣대입니다. 교육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흐르지 않게 하는 길잡이 같은 겁니다. 교육이 샛길로 빠지려 할 때 제갈길을 가게끔 하는 나침반 같은 겁니다. 그런데 학창 시절에 벌을 받는데 익숙했던 우리들은 더 강한 벌을 주고 싶어합니다. 저 네 가지를 따지다 보면 결국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경각심도 못 일깨워주고, 아이들은 콧방귀나 뀔 것 같습니다. 결국 말도 잘 안 들을 것 같고요. 그렇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해야 할 것들에 대한 단단한 단호함으로 무장한 교사 앞에서 아이들은 오히려 별말없이 잘 따릅니다. 물론 저는 엄청 단단하지는 못하고 때로 물러터지기도 해서 아직 시행착오중이지만요. 그래도 제 경험을 토대로 어떤 식의 ‘책임지는 행동’이 ‘벌’ 대신 가능한지 예시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일단 저 네 가지 잣대가 너무 많고 거추장스러우면, 단 하나라도 제대로 내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하나씩 추가해서 받아들이고요. 제 경우에도 저 네 가지가 한번에 들어오지 않아 제일 제 마음에 다가왔던 하나만 가지고 붙잡았습니다. 저의 경우 ‘연관성’에 꽂혔습니다. 이 연관성만 제대로 갖고 와도, 아이에게 ‘책임지는 행동’을 요구할 때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숙제를 안 해온 학생들이 있습니다. 숙제를 안 해온 학생들에게 청소를 시킨다거나 명심보감을 쓰게 한다면, 이게 맞는 걸까요? 숙제와 청소, 명심보감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논리적 연관 관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도 떨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숙제를 안 한 아이들은 쉬는 시간 또는 남아서 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 더 나아간다면 내가 못한 숙제에 더해 다음 숙제까지 하게 합니다. 한 번 못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다음 숙제까지 하게 하는 건 설득력이 있습니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 볼까요? 다른 세 가지 잣대도 들여다볼게요. 제가 다음으로 보는 잣대는 ‘도움이 되는(Helpful) 방식인가’입니다. 저는 본질적인 걸 되도록 생각하려 하는데, 아이들이 하는 일들이 본인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면 굳이 할 필요 없겠지요. 못한 숙제를 쉬는 시간에 하는 건 본인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게 만약 본인 숙제와 전혀 관련 없는 ‘청소 벌’이었다면, 숙제를 통해 알아야 할 것을 청소를 하면서 알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숙제를 통해 알아야 할 것들은 숙제를 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숙제를 쉬는 시간에 하는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도움이 되는 방식입니다. ‘합리적인지(Reasonable)’도 따져보겠습니다. 이건 쉬는 시간에 해내야 하는 숙제의 양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애초에 숙제의 양이 적절했다는 가정하에, 자기가 못한 숙제를 쉬는 시간에 하는 것 자체는 합리적인 양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만 추가로 다음 숙제까지 해내야 하는 경우 그 양에 따라 문제가 될 순 있겠지요. 그때그때 따져서 그 양을 조절하거나 교사가 충분한 도움을 줘 적절하게 해결할 수 있게 하면 되겠지요. 존중과 책임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존중하는 방식(Respectful)’인지 따져봐야 하는데, 이 부분이 어쩌면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뭐가 문제일까 싶지만, 과제를 쉬는 시간에 시켰다는 게 문제입니다. 바로 학생의 휴식권 보장을 어겼다는 거지요. 대부분의 시·도 학생인권조례(없는 시·도도 있습니다)에서는 학생의 휴식권 보장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예시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를 볼까요. 제10조(휴식을 취할 권리) ① 학생은 … 과중한 학습 부담에서 벗어나 적절한 휴식을 취할 권리를 가진다. ② 교장 등은 학생의사에 반하여 정규교과 이외의 교육활동을 강요함으로써 학생의 휴식을 취할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③ 교육감은 학생의 휴식을 취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정규교과 이외의 교육활동을 제한할 수 있다. 학생의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교사와 학교의 권위보다 학생의 권리 보장을 강조하는 교육적 입장을 취하는 몇몇 ‘학생인권근본주의자’들은 이 조항을 근거로 쉬는 시간에 학생들의 과제 수행을 문제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존중’이라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을 존중하는 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장선상에서 학생 인권도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권리는 책임과 함께 갑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마땅히 질 수 있고, 져야 하는 수준의 책임도 인권의 이름으로 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당연히 별 이유 없이, 혹은 교사가 공부를 더 시키겠다는 욕심으로 쉬는 시간을 주지 않으면 휴식권 침해가 맞습니다. 저는 쉬는 시간을 어떤 이유로든 못 줬다면 다음에 꼭 더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휴식권은 아이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쉬는 시간을 제대로 주지 않는 교사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의 상황은 다릅니다. 과제 수행을 하지 못한 아이가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내 휴식권의 일부분을 반납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겁니다. 책임을 진다는 건 그런 겁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와 권한을 잠시 내려놓는 상황도 충분히 감수해야 하는 겁니다. 휴식권이란 게 어떤 상황에서도 침해받지 말아야 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닙니다. 몇 가지 예를 더 보겠습니다. 복도를 뛰는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거의 저는 뛰는 아이에게 소리쳤습니다. “누가 복도에서 뛰어!” 그러고 멈춰 세우고선 무섭게 혼냈습니다. “여기가 너만 다니는 곳이야? 어디서 뛰어다니고 있어!” 이런 고압적인 방식은 다른 건 몰라도 존중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지금의 저는 달리는 아이를 손으로 막으며 “잠깐 멈출게요” 하고 멈춰 세웁니다. 그리고선 이렇게 묻고 말합니다. “복도에선 어떻게 해야죠? 네, 맞아요. 걸어 다녀야 합니다. 걷는 연습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저기까지 걸어갔다 오겠습니다.” 아이가 뛰었으니 뛰지 않고 걸어가는 연습을 시키는 겁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정확히 ‘연관(Related)’됩니다. 아이는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이 방식이 혹시 벌주는 것처럼 느껴지시나요? 어쩌면 벌처럼 비춰질 수 있는 요소(복도 걷는 연습)를 고압적이지 않게, 그저 담담히 단호한 어조로 그 논리적 연관성을 설명하며 제시함으로써 벌의 느낌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존중받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무언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걷는 연습은 미약하나마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Helpful)’ 방식입니다. 물론 아이는 이 시간만 지나가기를 바라며 안 보이는 곳에서 뛸 생각을 하겠지만요. 핵심은 원상복구, 그리고 어루만짐 ‘책임지는 행동’의 핵심은 그것입니다. 바로 원상복구, 즉 원래대로 해놓기. 간단합니다. 숙제를 안 했으면 숙제를 하기. 복도를 뛰었으면 복도를 뛰지 않고 걷기(걷는 연습하기). 여기서 하나 나눠볼 건, 내 행동으로 누군가 피해를 입었냐 입지 않았느냐입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문제행동은 말한 대로 원상복구까지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누군가한테 피해를 주었다면, 원상복구에 더해 상처받은 상대방의 마음까지 어루만져야 합니다. 보통 그 어루만짐은 사과의 형태로 이뤄지죠. 이전 글에서 예로 들었던 상황인데요. 내가 요리 시간에 케찹을 갖고 장난을 치다 옆에 있는 친구의 옷에 케찹을 묻힌 상황입니다. 명백히 피해를 준 상황이지요. 이럴 때 첫째로, 기본은 원상복구입니다. 친구의 옷에 묻은 케찹을 닦고 지워줘야 합니다. 화장실에 가서 박박 문질러 줘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안 지워지면 새로 옷을 사줘야 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상처받은 친구의 마음을 어루만져 줘야 합니다. 내 행동으로 속이 상한 친구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내가 복도에서 뛰다가 친구와 부딪혀 친구가 넘어져 다쳤다면, 첫째, 원상복구, 친구를 보건실에 데려가서 상처를 치료하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둘째, 어루만짐, 친구에게 준 피해에 대해 사과합니다. 원상복구와 어루만짐, 이 두 가지가 함께해야 책임지는 행동의 기본이 완성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문제행동에 대한 ‘책임지는 행동’을 어떠한 기준과 잣대로 정해야 할지 살펴봤습니다. 벌이 아니라 책임지는 행동입니다. 저의 경우 제일 중요하게 봤던게 ‘연관성(Related)’인데, 문제행동과 책임지는 행동과의 논리적 연관성을 항상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책임지는 행동의 방향이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어떤 부분일까요. 바로, 책임지는 행동을 항상 제가 일방적으로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크게 걸리지 않으실 분도 계시겠지만, 저의 경우 그랬습니다. 어쨌든 여전히 권위적인 걸 싫어하고 민주적이고 싶어하는 제 마음은 마음속에 항상 꺼림직함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맞습니다. 책임지는 행동을 아이들과 함께 정하는 거지요. 일종의 ‘학급회의’를 통해서요. 그게 가능한 거며, 또 올바른 걸까요? 저도 고민 중에 있지만, 다음 글에서는 불완전하나마 그에 대해 써 볼까 합니다.
더에듀 김연재 수습기자 | 미래교실 통합 컨설팅 기업 ‘쿨스쿨’이 쿨러닝 인공지능(AI) 플랫폼으로 유비온의 딥러닝 교육서비스 ‘딥코(DEEP:CO)’를 공식 채택했다. 쿨스쿨과 유비온은 지난 26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고 29일 밝혔다. 이번 협약으로 쿨러닝은 딥코를 기반으로 다양한 AI 저작도구와 학습 콘텐츠가 통합 운영되는 ‘전문 AI 교육 플랫폼’으로 변화할 예정이다. 쿨스쿨은 딥코를 쿨러닝의 핵심 엔진으로 도입해 딥코가 보유한 강력한 AI 튜터링 및 학습 분석 기능을 토대로 교과 융합형 프로젝트 수업과 체험형 AI 학습이 가능한 ‘AI 융합교실 표준 모델’을 본격적으로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쿨그쿨은 당초 쿨러닝을 다양한 에듀테크 도구 연결 통합인증(SSO, 한 번의 로그인으로 여러 개의 사이트들을 이용하는 방법) 기반 플랫폼으로 기획했으나 내년 이후 학교 현장의 수요가 ‘실질적인 AI 활용 교육’에 집중될 것으로 예측해 방향을 전환했다. 오진연 쿨스쿨 대표는 “기존의 통합인증 방식만으로는 고도화된 AI 교육 수요를 충족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딥코를 ‘쿨러닝 AI 플랫폼’으로 도입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협력을 통해 공간과 기술, 그리고 전문적인 AI 교육 콘텐츠가 완벽하게 통합된 ‘AI 융합교실’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더에듀 전영진 기자 | 내년 경남교육감 선거 도전에 나섰던 이군현 전 국회의원이 보수 진영 후보 단일화 잡음을 이유로 사퇴했다. 이 의원은 29일 보도자료를 내고 “분옅과 절차의 불공정성 논란으로 보수 단일화가 좌초되어서는 안 된다”며 “솔선수범해야겠다는 각오로 사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현재 경남교육감 후보 단일화 연대가 중도·보수 후보 단일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지난 12일 1차 컷오프를 통해 권순기·김상권·김영곤·최병헌으로 압축했다. 그러나 김상권·김영곤 후보는 지난 16일 1차 컷오프 여론조사 통계자료 외부 유출 의혹을 제기하며 추후 일정 보이콧을 선언하는 등 잡음이 심각한 상황이다. 이 의원은 애초 토론도 없이 단일화를 추진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고 단일화 기구에 참여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여론조사 절차의 불공정성 논란으로 도민들의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며 “사법기관에 고발까지 진행되는 진흙탕 상황에 실망과 안타까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단일화가 되어야만 보수의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엄중히 명심해달라”며 “저는 물러나지만 경남교육의 미래는 멈출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분열이 아니라 단결”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올바른 가치관과 국가관을 갖춘 글로벌 인재들을 경남교육이 앞장서서 육성해 달라”며 “경남교육이 다시 우뚝 설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더에듀 지성배 기자 | 교육감 선거에 출마하는 모든 사람에게 휴직을 보장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국회 교육위원회)은 29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지방교육자치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고 밝혔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교원이 교육감 선거에 출마하는 경우, 휴직을 보장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이는 교수는 휴직 후 출마가 가능한 반면, 교원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차별 논란을 해소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김 의원은 이 법안들이 차별이라며, 지방교육자치법 개정안에 출마하려는 모든 직군 사람에게 휴직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았다. 김 의원은 “교원에게만 휴직을 보장하는 것은 평등권에 어긋난다”며 “특정 직군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공정하게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현행법에 따르면 교육감 선거에 출마하려는 초중등 교원은 선거일 90일 전까지 사직해야 한다. 백승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휴직 후 출마가 가능한 법안을 발의한 상태이다.
더에듀 김연재 수습기자 | 오재길 용인 보라초 교장과 정미라 화성 병점고 교사가 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교디연) 공동 소장으로 선출됐다. 교육부 정책보좌관으로 임명된 김성천 소장의 사임에 따름이다. 교디연은 지난 20일 운영진·연구위원 연석회의를 열고 내년부터 오재길·정미라 공동소장 체제로 운영하기로 결정했다고 29일 밝혔다. 오재길 신임소장은 현장 중심의 소통과 조직 운영을 바탕으로 연구소 구성원들의 실천을 연결하는 역할을, 정미라 신임소장은 정책 기획과 실행을 중심으로 연구소의 중장기 비전을 구체화 하는 역할을 맡아 현장성과 정책 전문성을 결합한 연구·실천 중심 운영 체계를 본격화할 예정이다. 특히 특정 진영이나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않고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성실히 담아내는 데 중점을 둘 계획이다. 교디연은 공동소장 체제 전환을 ‘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 2.0’ 시대로 선언했다. 2.0 시대에는 ▲현장 교사·연구자와의 연대 강화 ▲교육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안 제시 기능 고도화 ▲연구소 구성원 모두가 교육정책의 소비자를 넘어 연구자이자 실천가로 성장할 수 있는 문화 조성 ▲정책 형성과 실행 과정에 대한 연구와 실천의 저변 확대에 나설 방침이다. 교디연은 지난 10년간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수가 소장을 맡아 이끌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지난달 교육부 정책보좌관으로 임명되면서 공무에 집중하고자 연구소장직 사임을 표했다. 한편, 교디연은 지난 2016년 개소했으며, 교육정책 연구와 현장 기반 실천을 병행을 목표로 교육의 공공성과 학생 중심 가치를 중심에 둔 정책 담론 형성에 기여해 왔다. 특히 정부의 교육 정책과 교육감 정책에 대한 비판적 연구와 실천을 이어오며, 교육 담론 형성 과정에서 균형 잡힌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더에듀 김연재 수습기자 | 학생맞춤통합지원(학맞통)이 시행을 앞두고 논란에 빠진 가운데, 교사들이 학맞통법 폐지 요구 집회를 연다. 특히 학생이 아닌 아동으로 범위를 넓힌 아동맞춤통합지원법 제정을 촉구, 교육과 복지의 분리를 주장한다. 대한초등교사협회(대초협)은 내년 1월 26일 이 같은 요구의 목소리를 내는 집회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개최한다고 29일 밝혔다. 내년 3월 1일 시행 예정인 학맞통법은 ‘기초학력 미달, 경제적·심리적·정서적 어려움, 학교폭력, 경계선 지능, 아동학대 등 다양한 문제를 교육청 등 교육기관과 지자체 및 외부 전문기관이 복합적·통합적 지원에 나서는 체계’를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일부 시도교육청의 교원 연수 과정에서 교사의 역할로 ‘학생 부모 대출 알선’, ‘학생 집 화장실 수리 연계’ 등이 우수 사례로 공유되면서 현장의 공분을 샀다. 실제 대초협이 지난 20~27일 ‘학맞통 폐지 촉구 서명’에 전국 교사와 시민 3만 9376명이 참여하는 등 불만이 높은 상황이다. 대초협은 집회를 통해 교육과 복지의 명확한 구분을 요구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학맞통법은 폐지하고 아동이 중심이 된 아동맞춤통합지원법(아맞통법) 제정을 촉구할 예정이다. 대초협이 제안하는 아맞통법은 교육위가 아닌 보건복지위가 담당하고, 지원 대상은 학생에서 18세 미만 모든 국민(아동)으로 확대하며, 컨트롤 타워는 학교장이 아닌 지자체장이다. 교사의 역할은 복지사와 행정가에서 신고의무자로 바뀐다. 이를 위해 국회 교육위원들을 만나 4만명 가까이 참여한 반대 서명지를 전달하고 보건복지위원들에겐 아맞통법 취지를 설명하는 등 입법 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김학희 대초협 회장은 “학교는 교육을 하는 곳이지 복지 행정을 처리하는 곳이 아니다”라며 “집회를 통해 학맞통법의 위헌성과 부당함을 알릴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어 “학교 현장을 혼란에 빠뜨리는 학맞통법의 즉각적인 폐기를 강력히 요구할 것”이라며 “교육부가 아닌 보건복지부가 주관하고 지자체가 실행하는 시스템만이 아이들을 위한 진짜 복지”라고 강조했다.
더에듀 전영진 기자 | 올해 대입 수시 모집이 마감된 가운데 서울대·연세대·고려대(SKY)의 미충원 인원이 최근 4년새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최근 5년 중 자연계 미충원은 최고, 인문계 미충원은 최저를 기록, 정시 지원 전략에 영향이 미칠 것으로 예상됐다. 종로학원은 28일 이 같은 내용이 담긴 ‘2026학년도 SKY 수시 미충원인원 분석’ 자료를 공개했다. 이번 자료는 지난 24일 수시 최종 등록 마감 이후, 각 대학에서 홈페이지에 공개한 이월인원을 집계해 분석한 것이다. 집계 결과 SKY 수시 미충원 인원은 368명으로 지난해 279명 대비 89명(31.9%) 증가했다. 이는 지난 2023학년도 이후 지난 4년 사이 최고치이다. 특히 자연계열 미충원 인원이 263명으로 지난해 128명 대비 135명(105.5%) 증가했다. 이는 지난 2022학년도 이후 지난 5년 사이 최고치이다. 반면 인문계열 미충원은 95명으로 최근 5년새 최저치를 기록했다. 자연계열 미충원 학과는 서울대 19개, 연세대 20개, 고려대 29개였다. 특히 연세대 의예과와 고려대 의과대학에서도 각각 1명씩 발생했다. 인문계열 미충원 학과는 서울대 2개, 연세계 15개, 고려대 14개였다. 종로학원은 자연계열 미충원 인원 큰 폭 상승 원인으로 최상위권 학생의 수시 중복합격 증가, 지난해 의대 모집 인원 증가로 인한 고3 학생들의 대거 합격으로 올해 N수생과 반수생 감소로 추정했다. 인문계열 미충원 감소 원인으로는 최상위권 학생 중 수시 상위권 지원학생이 늘어나 경쟁이 치열해진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따라 수시 최종 중복 합격 인원도 줄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 같은 상황은 오는 29~31일 진행되는 정시 원서 접수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됐다. 종로학원은 “정시에서 인문계 학생들의 경쟁은 치열하고, 자연계열은 상위권 학생이 줄어들어 합격선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올해는 정서 원서 접수 기간이 3일에 불과하고 모든 대학이 일제히 마감하는 31일에 원서접수가 몰릴 것”이라며 “최종 정시 지원단계 직전까지 지원대학 각 학과의 수시 이월에 따른 모집인원 변동, 최근 발표된 각 대학들의 탐구 변환표준점수 적용방식 유불리, 정시 추가합격 규모 변수 등을 최종 체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더에듀 | “학교 급식만 제대로 제공해도 전 세계 영양결핍 인구를 1억 2000만명 줄일 수 있다.” 이 문장은 최근 12월 26일자 동아일보의 기사이다. 이는 급식을 단순한 학교 행정이 아닌, 인류 보건과 교육의 핵심 정책으로 재인식하게 한다. 한마디로 급식은 한 끼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의 성장선이고, 사회의 복지에 대한 품격이며, 국가가 미래에 대한 책임이다. 동 기사에 의하면 전 세계 사람들의 보건과 지구환경 관점에서 학교 급식의 질을 높여야 하는 과학적 당위성을 제시했다. 2030년까지 모든 아동에게 건강한 학교 급식을 제공하면 영양결핍 인구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동시에 연간 80만~120만명의 식습관 관련 질환 사망 억제, 온실가스 배출 감소 등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마르코 슈프링만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글로벌보건연구소 교수가 이끄는 국제 연구팀은 급식 매뉴 구성이 지구환경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결과도 내놨다. 채소 비중을 높이고 육류·유제품을 줄이면 온실가스 배출, 토자·물 사용 등 여러 환경 지표를 종합해 평가한 ‘환경부담 총량(환경 영향)’이 기존 식단 대비 약 50% 감소한다는 분석이다. 반면에 현행 국가별 또는 세계보건기구(WHO) 식이 지침만 따를 경우 환경 영향 감소 효과가 거의 없어 기존 지침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안타깝게도 2025년도는 학교 조리종사자 파업을 둘러싼 논란으로 우리 사회가 급식을 얼마나 가볍게 여겨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급식이 중단되자 불편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지만, 정작 질문은 충분히 던져지지 않았다. 이 급식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라는 질문이다. 많은 아이에게 학교 급식은 하루 중 유일하게 균형 잡힌 식사이며, 가정 형편과 상관없이 보장되는 최소한의 안전망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아동기의 영양 결핍은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영양이 부족한 아이는 학습 집중도가 떨어지고, 신체·정서 발달에 장기적인 영향을 받는다. 이는 학업 성취도의 격차로 이어지고, 다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학교 급식은 이 악순환을 끊는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정책이다. 따라서 유엔과 세계보건기구가 학교 급식을 ‘가장 비용 대비 효과가 높은 사회 투자’로 규정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효과적인 급식은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안전하고 질 높은 급식은 전문성과 노동 위에 성립된다. 매일 수백(천) 명의 식사를 책임지는 조리종사자들의 노동 강도는 이미 한계를 넘은 지 오래다. 이들의 처우를 개선하라는 요구는 특권이 아니라, 아이들의 먹거리를 지속 가능하게 지키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급식을 공공재로 인정한다면, 이를 담당하는 노동 또한 공공의 존중을 받아야 한다. 학교 급식에 대한 인식 전환은 이제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급식은 ‘값을 아껴야 할 영역’이 아니라 ‘투자해야 할 영역’인 것이다. 서두의 슈프링만 교수는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학교 급식이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건강 및 환경적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며 “학교 급식에 대한 대안 투자는 효과적이고 경제적으로 타당하다”고 말했다. 교실에서 아무리 좋은 교육과정을 운영해도, 아이의 몸이 버티지 못하면 교육은 작동할 수 없다. 즉, 교육의 출발선은 교과서가 아니라 식판 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급식은 교육 그 자체이다. 아이들은 급식을 통해 건강한 식습관을 배우고, 공동체의 규칙을 익히며, 공공의 배려를 경험한다. 질 좋은 급식은 아이들에게 사회가 자신을 돌보고 있다는 믿음을 준다. 그 경험은 성인이 되어 사회를 대하는 태도로 되돌아올 수 있다. 학교 급식을 지키는 일은 약자를 위한 시혜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 세대를 위한 가장 현실적인 국가 전략이자 책임이다. 급식을 비용으로 보는 사회는 미래를 절약하고, 급식을 투자로 보는 사회는 미래를 키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들의 점심을 국가의 중심 과제로 다시 세우는 일이라 할 것이다. 2025년을 보내며 그간의 학교 조리종사자들의 봉사와 헌신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아울러 올해 해결하지 못한 각종 처우와 근무 환경 개선에 국가와 교육 당국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 2026년에는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아이들에게 영양 있고 균형 잡힌 급식이 제공되어 미래 세대들의 건강과 학력 향상에 이바지하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