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에듀 | 실천교육교사모임은 현장교사들을 주축으로 현장에서 겪는 다양한 교육 문제들을 던져왔다. 이들의 시선에 현재 교육은 어떠한 한계와 가능성을 품고 있을까? 때론 따뜻하게 때론 차갑게 교육현장을 바라보는 실천교육교사모임의 시선을 연재한다. |
문제행동을 보인 아이, 어떻게 해야 하나
문제행동을 보인 아이를 보면 우리는 아주 따끔한 벌을 주고 싶습니다. 따끔한 벌을 주면 어쨌든 문제행동을 멈추니깐요.
저는 벌이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아이들은 벌을 받고 싶지 않아서라도 문제행동을 일시적이나마 멈춥니다. 이건 비단 아이들뿐만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벌'을 받고 싶지 않아 법을 지키고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해도 아무런 불이익도 없는 사회와 교실보다는, 벌과 엄격한 규율이 있는 사회와 교실이 저는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까지 부정할 마음은 없습니다.
다만, 학교라는 공간은 일반적인 사회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라는 공간은 어쨌든 교육을 하는 공간이니까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학교, 교실에서 벌이 행해지는 방식은 ‘교육적인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교실에서 벌이 이루어지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럼 벌 대신 뭘 해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참고로, 과거에 교실에서 이루어져 왔던 대표적인 벌에는, 바로 ‘체벌’이 있었죠. 솔직히 체벌의 문제점에 대해서 굳이 얘기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이건 그냥 폭력입니다. 누군가 아무리 큰 잘못을 했어도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건 안 되는 일입니다. 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운동장 뛰기, 이게 뭐가 문제지?
일단 정의를 조금 명확히 하겠습니다. 지금 얘기하고 있는 ‘벌’은 시스템으로서 학생에게 가해지는 벌, 즉 ‘징계’와는 다른 얘깁니다. 교사가 교실에서 문제행동을 보인 아이에게 나름의 판단으로 행하는 제재를 의미합니다.
신규 2년차 때 일입니다. 지지리도 말을 안 듣던 두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두 학생은 말도 안 듣는데, 둘이 허구헌 날 싸워댔습니다. 아무리 혼내고 다그쳐도 그때뿐, 수업 시간에는 집중도 안 하고 둘은 싸우고 또 싸웠습니다. 이렇게 맨날 싸워대는 둘을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싶어 전체 반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녀석 둘을 어떻게 하면 좋겠니.”
아이들은 이것저것 얘기했습니다. 엉덩이로 이름쓰기 같은 것들, 아직 3학년인 아이들에게 나올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다 아이들에게 콕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나 봅니다.
바로 ‘운동장 뛰기!’
가장 많은 아이가 골랐던, 이 두 녀석들을 위한 일종의 ‘벌’이었습니다. 스무 바퀴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사자 아이들한테도 물었더니 괜찮다고 합니다.
수업 끝나고 그 아이들으 함께 운동장을 뛰었고, 나머지 애들은 키득이면서 그 뛰는 걸 구경했습니다. 보니 스무 바퀴까지 뛰는 건 무리겠다 싶어 제가 중간에 열 바퀴로 줄였습니다. 열 바퀴를 다 뛴 두 아이들은 헉헉댔습니다. 그 둘은 땀 흘리며 같이 뛴 게 나름 좋았던지 같이 사이좋게 집에 갔습니다.
나쁘지 않은 모습 같았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부끄러운 과거가 또 있나 싶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그때는 이게 뭐가 문젠가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아이들과 함께 정했고, 당사자 아이들도 받아들였고, 그렇게까지 비극적인 결말(?) 없이 잘 뛰고 잘 갔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일단 학생을 ‘존중하는(Respectful)’ 방식이 아닙니다.
신체를 고통스럽게 하는 벌은 전근대적입니다. 이게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이들도 받아들였고 잘 뛰었고 별 탈 없지 않았냐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운동장 벌’을 과연 이 아이들 말고 다른 아이들한테도 일반화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약간의 주저함이 생겨납니다.
이 아이들이 다음에 또 말을 안 들으면 운동장 도는 횟수를 늘려야 할까요? 늘리고 늘려 이 아이들이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만큼 힘들게 해야 이 벌을 효과적으로 쓰는 걸까요?
다음으로 아이의 잘못과 이 벌은 ‘연관성(Related)’이 없습니다.
아이 둘이 말을 안 듣고 다툰 것과 운동장 달리기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요? 예컨대 육상부 아이가 연습에 늦어서 연습 참여에 그만큼 못했다고 합시다. 이 육상부 아이를 육상부 감독이 남겨서 운동장을 뛰게 한 건 이해가 갑니다. 달리기 연습에 늦어 더 달리게 한 건 서로 연관이 있잖아요. 그렇지만 아이가 말을 안 들은 것과 운동장 뛰는 것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거죠.
이 벌이 ‘합리적(Reasonable)’인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운동장 스무 바퀴는 아이들이 견디기에 충분한 강도인가요? 중간에 제가 열 바퀴로 줄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따지고 보면 열 바퀴도 적절한 수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이게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Helpful)’ 방식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뛰는 게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을까요? 아이들이 말도 잘 듣고 서로 안 싸우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을까요?
예상하겠지만 이 두 아이들은 여전히 말을 안 들었고, 여전히 계속 싸웠습니다. 애초에 이 운동장 벌은 아이들을 힘들게 해서, 다음부터 너희들이 또 말을 안 들으면 이렇게 힘들게 할 거라는 제 마음속 가학적 심보 속에서 출발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문제행동을 멈추게 하려는 속셈만 있었지, 진정으로 이게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방식인지는 따져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설사 이 운동장 벌 이후에 문제행동을 멈췄다 하더라도, 그건 진정으로 이 운동장 벌이 본인들 스스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식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힘들어서 그런 거였을 겁니다.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격입니다. 이 아이들은 이 ‘운동장 벌’이 할만했다면 문제행동을 굳이 고치지 않을 겁니다. 또 다른 곳에서는 여전히 문제행동을 계속 보였을 테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제 부끄러운 과거를 비판한 잣대는 4가지였습니다. 존중하는 방식인지(Respectful), 서로 연관성이 있는지(Related), 합리적인지(Reasonable), 도움이 되는 방식인지(Helpful). 이 네 가지 잣대는 학급긍정훈육법(PDC)에서 흔히 3R1H라는 이름으로 다루고 있는 것들입니다.
이 네 가지를 따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 중요한 잣대입니다. 교육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흐르지 않게 하는 길잡이 같은 겁니다. 교육이 샛길로 빠지려 할 때 제갈길을 가게끔 하는 나침반 같은 겁니다.
그런데 학창 시절에 벌을 받는데 익숙했던 우리들은 더 강한 벌을 주고 싶어합니다. 저 네 가지를 따지다 보면 결국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경각심도 못 일깨워주고, 아이들은 콧방귀나 뀔 것 같습니다. 결국 말도 잘 안 들을 것 같고요.
그렇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해야 할 것들에 대한 단단한 단호함으로 무장한 교사 앞에서 아이들은 오히려 별말없이 잘 따릅니다. 물론 저는 엄청 단단하지는 못하고 때로 물러터지기도 해서 아직 시행착오중이지만요. 그래도 제 경험을 토대로 어떤 식의 ‘책임지는 행동’이 ‘벌’ 대신 가능한지 예시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일단 저 네 가지 잣대가 너무 많고 거추장스러우면, 단 하나라도 제대로 내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하나씩 추가해서 받아들이고요.
제 경우에도 저 네 가지가 한번에 들어오지 않아 제일 제 마음에 다가왔던 하나만 가지고 붙잡았습니다. 저의 경우 ‘연관성’에 꽂혔습니다. 이 연관성만 제대로 갖고 와도, 아이에게 ‘책임지는 행동’을 요구할 때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숙제를 안 해온 학생들이 있습니다. 숙제를 안 해온 학생들에게 청소를 시킨다거나 명심보감을 쓰게 한다면, 이게 맞는 걸까요? 숙제와 청소, 명심보감이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논리적 연관 관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도 떨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숙제를 안 한 아이들은 쉬는 시간 또는 남아서 해야 합니다. 여기서 하나 더 나아간다면 내가 못한 숙제에 더해 다음 숙제까지 하게 합니다. 한 번 못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다음 숙제까지 하게 하는 건 설득력이 있습니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들어가 볼까요? 다른 세 가지 잣대도 들여다볼게요.
제가 다음으로 보는 잣대는 ‘도움이 되는(Helpful) 방식인가’입니다. 저는 본질적인 걸 되도록 생각하려 하는데, 아이들이 하는 일들이 본인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면 굳이 할 필요 없겠지요.
못한 숙제를 쉬는 시간에 하는 건 본인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게 만약 본인 숙제와 전혀 관련 없는 ‘청소 벌’이었다면, 숙제를 통해 알아야 할 것을 청소를 하면서 알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숙제를 통해 알아야 할 것들은 숙제를 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숙제를 쉬는 시간에 하는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도움이 되는 방식입니다.
‘합리적인지(Reasonable)’도 따져보겠습니다. 이건 쉬는 시간에 해내야 하는 숙제의 양과 관련이 있을 겁니다. 애초에 숙제의 양이 적절했다는 가정하에, 자기가 못한 숙제를 쉬는 시간에 하는 것 자체는 합리적인 양이라고 할 것입니다. 다만 추가로 다음 숙제까지 해내야 하는 경우 그 양에 따라 문제가 될 순 있겠지요. 그때그때 따져서 그 양을 조절하거나 교사가 충분한 도움을 줘 적절하게 해결할 수 있게 하면 되겠지요.
존중과 책임 사이에서
마지막으로 ‘존중하는 방식(Respectful)’인지 따져봐야 하는데, 이 부분이 어쩌면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뭐가 문제일까 싶지만, 과제를 쉬는 시간에 시켰다는 게 문제입니다. 바로 학생의 휴식권 보장을 어겼다는 거지요.
대부분의 시·도 학생인권조례(없는 시·도도 있습니다)에서는 학생의 휴식권 보장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 예시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를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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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조(휴식을 취할 권리)
① 학생은 … 과중한 학습 부담에서 벗어나 적절한 휴식을 취할 권리를 가진다. ② 교장 등은 학생의사에 반하여 정규교과 이외의 교육활동을 강요함으로써 학생의 휴식을 취할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③ 교육감은 학생의 휴식을 취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정규교과 이외의 교육활동을 제한할 수 있다. |
학생의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삼아, 교사와 학교의 권위보다 학생의 권리 보장을 강조하는 교육적 입장을 취하는 몇몇 ‘학생인권근본주의자’들은 이 조항을 근거로 쉬는 시간에 학생들의 과제 수행을 문제삼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존중’이라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을 존중하는 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연장선상에서 학생 인권도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권리는 책임과 함께 갑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마땅히 질 수 있고, 져야 하는 수준의 책임도 인권의 이름으로 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당연히 별 이유 없이, 혹은 교사가 공부를 더 시키겠다는 욕심으로 쉬는 시간을 주지 않으면 휴식권 침해가 맞습니다. 저는 쉬는 시간을 어떤 이유로든 못 줬다면 다음에 꼭 더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휴식권은 아이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쉬는 시간을 제대로 주지 않는 교사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위의 상황은 다릅니다. 과제 수행을 하지 못한 아이가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내 휴식권의 일부분을 반납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는 겁니다. 책임을 진다는 건 그런 겁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권리와 권한을 잠시 내려놓는 상황도 충분히 감수해야 하는 겁니다. 휴식권이란 게 어떤 상황에서도 침해받지 말아야 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아닙니다.
몇 가지 예를 더 보겠습니다. 복도를 뛰는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과거의 저는 뛰는 아이에게 소리쳤습니다.
“누가 복도에서 뛰어!”
그러고 멈춰 세우고선 무섭게 혼냈습니다.
“여기가 너만 다니는 곳이야? 어디서 뛰어다니고 있어!”
이런 고압적인 방식은 다른 건 몰라도 존중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지금의 저는 달리는 아이를 손으로 막으며 “잠깐 멈출게요” 하고 멈춰 세웁니다. 그리고선 이렇게 묻고 말합니다.
“복도에선 어떻게 해야죠? 네, 맞아요. 걸어 다녀야 합니다. 걷는 연습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저기까지 걸어갔다 오겠습니다.”
아이가 뛰었으니 뛰지 않고 걸어가는 연습을 시키는 겁니다. 이는 논리적으로 정확히 ‘연관(Related)’됩니다. 아이는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이 방식이 혹시 벌주는 것처럼 느껴지시나요? 어쩌면 벌처럼 비춰질 수 있는 요소(복도 걷는 연습)를 고압적이지 않게, 그저 담담히 단호한 어조로 그 논리적 연관성을 설명하며 제시함으로써 벌의 느낌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존중받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무언가 함부로 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불어 걷는 연습은 미약하나마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Helpful)’ 방식입니다. 물론 아이는 이 시간만 지나가기를 바라며 안 보이는 곳에서 뛸 생각을 하겠지만요.
핵심은 원상복구, 그리고 어루만짐
‘책임지는 행동’의 핵심은 그것입니다. 바로 원상복구, 즉 원래대로 해놓기. 간단합니다. 숙제를 안 했으면 숙제를 하기. 복도를 뛰었으면 복도를 뛰지 않고 걷기(걷는 연습하기).
여기서 하나 나눠볼 건, 내 행동으로 누군가 피해를 입었냐 입지 않았느냐입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문제행동은 말한 대로 원상복구까지만 해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누군가한테 피해를 주었다면, 원상복구에 더해 상처받은 상대방의 마음까지 어루만져야 합니다. 보통 그 어루만짐은 사과의 형태로 이뤄지죠.
이전 글에서 예로 들었던 상황인데요. 내가 요리 시간에 케찹을 갖고 장난을 치다 옆에 있는 친구의 옷에 케찹을 묻힌 상황입니다. 명백히 피해를 준 상황이지요. 이럴 때 첫째로, 기본은 원상복구입니다. 친구의 옷에 묻은 케찹을 닦고 지워줘야 합니다. 화장실에 가서 박박 문질러 줘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안 지워지면 새로 옷을 사줘야 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 상처받은 친구의 마음을 어루만져 줘야 합니다. 내 행동으로 속이 상한 친구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합니다.
내가 복도에서 뛰다가 친구와 부딪혀 친구가 넘어져 다쳤다면, 첫째, 원상복구, 친구를 보건실에 데려가서 상처를 치료하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둘째, 어루만짐, 친구에게 준 피해에 대해 사과합니다.
원상복구와 어루만짐, 이 두 가지가 함께해야 책임지는 행동의 기본이 완성되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문제행동에 대한 ‘책임지는 행동’을 어떠한 기준과 잣대로 정해야 할지 살펴봤습니다. 벌이 아니라 책임지는 행동입니다. 저의 경우 제일 중요하게 봤던게 ‘연관성(Related)’인데, 문제행동과 책임지는 행동과의 논리적 연관성을 항상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책임지는 행동의 방향이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어떤 부분일까요. 바로, 책임지는 행동을 항상 제가 일방적으로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크게 걸리지 않으실 분도 계시겠지만, 저의 경우 그랬습니다. 어쨌든 여전히 권위적인 걸 싫어하고 민주적이고 싶어하는 제 마음은 마음속에 항상 꺼림직함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맞습니다. 책임지는 행동을 아이들과 함께 정하는 거지요. 일종의 ‘학급회의’를 통해서요. 그게 가능한 거며, 또 올바른 걸까요? 저도 고민 중에 있지만, 다음 글에서는 불완전하나마 그에 대해 써 볼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