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에듀 | 실천교육교사모임은 현장교사들을 주축으로 현장에서 겪는 다양한 교육 문제들을 던져왔다. 이들의 시선에 현재 교육은 어떠한 한계와 가능성을 품고 있을까? 때론 따뜻하게 때론 차갑게 교육현장을 바라보는 실천교육교사모임의 시선을 연재한다. |
언제나 기억해야 할 생활지도의 첫 번째, 공감하기
친절하며 단호하다는 건 ‘감정에 친절하고 행동에 단호’하다는 것이라 했습니다. 뭔가 있어 보이게 써서 그렇지 사실 진짜 별거 아닙니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감정 공감 먼저 한 번 해주고 혼내라!’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혼내는 것과는 다르긴 하지만, 뭐 거칠게 얘기하자면 그렇다는 말입니다.
말은 쉬운데 실천하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일단 이전 글에서 말했듯, 많은 교사가 교권 사태 전후로 아이들 감정 읽어주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딱히 부정적이지 않은 교사들조차도 감정 읽어주기를 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릴 적 선생님이나 다른 어른에게 딱히 공감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성인과 학생은, 더 보편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과 나이 어린 사람은 좋든 싫든 수직적 관계를 강요받았고, 이런 관계에서는 공감이 들어설 자리가 딱히 없습니다.
그렇다고 교사들이 성인이 되어서, 특히 교사 양성 기관에서 공감하기에 대해 연습하거나 훈련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공감하기는 사실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 영역입니다.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의식적으로 계속 생각하지 않으면 그 낯간지러울 수도 있는 말을 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공감하기의 중요성을 어디서 배워본 적도 없습니다.
설사 내가 진짜 잘못한 경우라도 내 잘못에 대해 다이렉트로 지적당하고 훈계받고 혼나면 기분 좋을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잘못했으니 그 정돈 받아들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렇긴 합니다만, 인간이라는 게 내가 잘못이 있어도 내 인격이 뭉개지는 방식으로 책임지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기회만 주어지면 내 잘못을 스스로 주워 담고 싶어 합니다. 스스로 책임지는 대신, 누군가에게 질책받고 혼나고 싶어하지 않아 합니다. 책임질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지면,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 잘못을 만회하려 노력합니다.
우리는 인격을 뭉개는 방식 대신 학생들이 내가 존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고 스스로 잘못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줘야 합니다. 그 첫 관문이 바로 공감입니다.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는 건 그 다음에 해도 충분합니다.
이전 글에서도 얘기했듯, 감정을 읽어주면 1차 감정 저지선이 스르륵 내려갑니다. 반항하려고 힘을 잔뜩 주던 아이도 자기도 모르게 힘이 빠져 버립니다. 공감받는다는 건 그런 겁니다. 힘이 빠져 버리면 서서히 자기 잘못에 대해 들을 준비가 됩니다. 너의 잘못, 너의 책임에 대해서는 그때부터 파고들면 됩니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은근히 고학년에게 잘 먹힙니다. 사춘기에 접어들고 자기를 이해해주는 사람 누구 하나 없고 맨날 잔소리하는 사람 천지라고 느낄 때 들어오는 공감 한 스푼은 아이를 무장해제 시킵니다.
다소 공감하기의 힘을 과대평가 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아이한테든 먹히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공감하기의 힘이 생각보다는 크다는 걸, 해보지 않으신 분은 한 번쯤 경험해 보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힘주어 말해봅니다.
언제나 감정 먼저 읽어줘야 하는 건 아니다
어떤 것이든 절대적인 건 없습니다. 항상 감정 읽기를 먼저 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예컨대 두 아이가 진짜 주먹다짐하며 싸우고 있는데 공감 먼저 해야 한답시고 주먹질하는 아이 앞에서 “너네가 때리고 싶을 만큼 서로에게 화나는 건 알겠는데...”라고 말하고 있는 건 코미디입니다.
아이 귀에 그 말이 들릴까요? 뭐가 더 시급한 걸까요? 당연히 당장 주먹다짐하며 싸우는 그 자체를 말리는 걸 최우선으로 두어야 합니다. 싸우는 아이 가운데를 가로막든 큰소리로 잠시 시선을 끌어 멈추게 하든, 싸움을 멈추게 하는 게 최우선 순위입니다. 공감하기는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이가 싸우는 걸 멈춘 후에는 공감하기가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할 겁니다. 아직 분이 덜 풀렸어도, 싸우는 걸 멈춘 후 그 아이의 화난 감정을 조금이라도 공감해준다면 화가 누그러지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이제 제가 실제 겪었던 일들을 사례로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아래 나온 아이 이름은 모두 가명입니다.
당황하지 말고 친절하며 단호하게
현우는 잘 흥분하는 아이입니다. 장난기도 많고 몸을 잘 주체하지 못해 항상 몸을 이리저리 움직입니다. 그런 모습이 거슬리는 주변의 아이들은 현우에게 뭐라 한마디 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잘 참다가도 한번 흥분하면 가끔은 걷잡을 수 없어 교실을 나간 적도 있습니다.
한 번은 줄을 서서 한 명씩 공을 던져 바구니에 넣는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번 하면 다시 맨 뒤로 가서 줄을 서고, 자기 차례가 오면 다시 공을 던져 바구니에 넣는 활동입니다. 현우 차례가 되어 바구니에 공을 던졌는데 공이 뒤에 있는 벽에 맞고 튕겨 나와 다시 현우 손으로 돌아왔습니다. 한 번씩 하고 뒤로 가야 하는 것이 규칙이니 그만해야 하는데, 현우는 그 공을 한 번 더 던졌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왜 두 번 하냐며 현우에게 뭐라 했습니다. 다음 번에 한 번 쉬라고 하면서요. 현우가 다시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 한번 쉬지 않고 또 던졌습니다. 몇 아이들은 또 현우에게 뭐라 했습니다. 왜 또 하냐고요.
현우의 눈빛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목소리도 달라집니다.
“왜 나한테만 그래!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
목소리가 점점 커집니다. 그러면서 자기에게 가장 뭐라 했던 한 아이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고작 3학년인 현우는 죽여버린다는 소리와 함께 그 아이한테 가려 합니다.
사실 이런 상황이 오면 선생님도 순간적으로 당황하기 마련입니다. 보통의 아이라면 선생님에게 하소연하듯 이르거나 아니면 똑같이 대거리하면서 싸우기 마련인데, 현우는 눈빛부터 달라졌고 죽여버리겠다는 무서운 말과 함께 그 아이를 향해 다가갔으니까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공감과 단호함이면 대부분의 사건은 힘겹지만 해결됩니다.
이런 경우 공감을 먼저 해줘야 할까요, 단호함을 먼저 보여야 할까요. 저의 경우 단호함을 먼저 보였습니다. 아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안 돼.”
“죽여버릴 거야.”
“아니, 그건 안 돼.”
“죽여버릴 거야, 씨.”
“안 돼.”
“죽여버릴 거야!”
“아니, 안 돼.”
여기서 교사가 굳이 큰소리로 어디서 그런 말을 하냐며 호통칠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나지막이, 그리고 단호하게 안 된다고 반복해서 얘기해주면 됩니다.
그러고 나서 틈을 봐 가볍게라도 공감하는 듯한 말을 툭 던져 좁니다.
“현우, 무슨 일이야.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났어.”
“쟤가 저한테만 뭐라 하잖아요!”
“그랬구나. 현우한테만 뭐라 하는 거 같아서 이렇게 화가 난 거구나.”
“네, 도현이도 두 번 했는데 저한테만 그래요!”
“그래? 도현이도 그랬는데 너한테만 뭐라 한 거 같아서 더 화가 났구나.”
이 정도만 돼도 상황은 종료입니다. 그다음부터 아이는 다른 시간에 있었던 억울한 얘기까지 이어갔는데, 적당히 들어주고 마지막은 그래도 죽이겠다고 말하는 건 안 된다고 마무리 짓고 끝냈습니다. 아이의 화는 어느새 누그러져 있었습니다.
아이가 사과를 원한다고 언제나 들어줘야 하는 건 아니다
짝과 함께 공 주고 받기를 할 때 일입니다. 사용한 공은 배구공보다는 훨씬 말랑하고 탱탱볼보다는 조금 단단한 공입니다. 그리 어려운 활동은 아니나 가끔 다른 아이가 던진 공에 실수로 맞는 경우가 생기긴 합니다.
형진이가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약간 훌쩍이는 듯한 표정으로 왔습니다.
“선생님, 지호가 공으로 제 얼굴 맞혔어요.”
지호는 형진이와 공을 주고받았던 짝입니다. 형진이는 ‘맞았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맞혔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사실 그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날아오는 공을 가슴과 손을 이용해 받으면 되는데, 형진이는 공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공을 자주 얼굴 쪽으로 해서 받습니다. 그러면서 공이 얼굴에 맞듯이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감을 먼저 해주었습니다.
“아고, 공에 맞았구나. 하다 보면 공이 그렇게 맞기도 하는데 맞으면 또 아프지. 괜찮아?”
여전히 아이는 얼굴에서 손을 내리지 않고 울먹이며 얘기합니다.
“그런데 지호가 공을 던져서 맞았어요.”
“그래, 하다 보면 공에 맞을 수도 있는 거야. 많이 아파서 힘들면 잠시 쉬었다가 해도 돼.”
“공 맞혔는데 사과도 안 해요.”
“지호가 형진이가 다른 데 보고 있는 사이에 공을 막 세게 던졌어?”
“아니요.”
“그럼 이건 그냥 공을 주고받다가 실수로 일어난 일이야. 형진이가 공을 얼굴 쪽으로 받아서 그런 건데, 가슴 쪽으로 받는 연습을 더 해야 해.”
“그런데 제 얼굴에 던졌는데 사과도 안 하고...”
“사과를 받고 싶구나. 그런데 공을 던지다 보면 그게 얼굴 쪽으로 갈 수도 있고 몸쪽으로 올 수도 있어. 얼굴 쪽으로 와도 내가 몸을 조절해서 가슴 쪽으로 받는 연습을 해야 해. 이건 지호가 사과할 일은 아니야 형진아.”
“아니 그게...”
이렇게 말하는 저에게 많이 섭섭했는지, 형진이는 더 많이 울먹이면서 말끝을 흐립니다.
아이가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감정 자체는 수용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사과를 받기 원한다고 모두 사과를 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사과받을 일과 아닌 일을 때로 교사가 판단해서 가려줄 필요도 있고, 이건 사과받을 일이 아니라는 걸 알려줄 필요도 있습니다.
더 속상해하고 더 흐느끼고 더 아파하는(아픈 듯 보이게 하는) 형진이에게 말했습니다.
“맞아서 아프고 속상하구나. 아프지. 속상할 수 있어. 그런데 이건 지호가 사과할 일은 아니야. 힘들겠지만 형진이가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야. 아프고 힘들면 잠시 쉬었다 해도 돼. 저기 가서 쉬었다가 다시 괜찮아지면 얘기해. 그때 다시 하자.”
형진이의 속상한 마음을 공감해 주었지만, 형진이가 받아들여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가감없이 얘기해 주었습니다. 형진이는 여전히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않고 쉬러 갔습니다.
그리고 10분쯤 지나 괜찮아졌다며 형진이는 지호와 다시 아무렇지 않게 짝 활동을 했습니다. 원래 억울한 거에 대해서 쉽게 인정하거나 쉽게 풀리지 않는 아이인데 말입니다.
선생님이 아마 잘못한 자신을 일방적으로 크게 혼냈다면 10분이 지나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을 아이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속상하고 힘든 걸 알아준 부분이 분명 힘을 발휘했을 겁니다.
자기 혼자 쉬면서 아이는 자기 마음을 스스로 다독였을 겁니다. 여전히 억울한 마음을 혹여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이는 한 번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며 곰곰이 따져봤을 겁니다. 적어도 다시 선생님한테 그 상황에 대한 억울함을 겉으로 표출하지 않을 정도는 됐을 겁니다.
선생님의 친절하며 단호한 태도가 아이에게 분명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