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에듀 | 실천교육교사모임은 현장교사들을 주축으로 현장에서 겪는 다양한 교육 문제들을 던져왔다. 이들의 시선에 현재 교육은 어떠한 한계와 가능성을 품고 있을까? 때론 따뜻하게 때론 차갑게 교육현장을 바라보는 실천교육교사모임의 시선을 연재한다. |
조선미 교수에게 실망한 까닭은
육아 교육 분야에서 한창 뜨고 있는 조선미 아주대 교수는 최근 ‘당신은 이미 충분합니다’라는 제목의 직무연수를 열었습니다. 마치 라디오 상담처럼 교사가 자신이 힘든 점을 적어 사연을 보내면, 조 교수가 그 사연 중 하나를 골라 조언해 주는 형식으로 꾸려진 연수였습니다.
한 교사가 ‘친절하지만 단호한’ 교사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식의 사연을 보냈는데 조선미 교수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친절하지만 단호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말을 자주 쓰는데, 그건 이상적이며 비현실적 욕구이다. 친절과 단호함을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나쁜 사람으로 비추는 걸 두려워하는 것 같다. 다정할 땐 다정하게, 엄격할 땐 엄격하게 대해야 한다.”
일견 타당한 말이기도 합니다. 나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두려워 단호해야 할 때 단호하지 못하는 걸 꼬집는 것 같기도 합니다. 친절함과 단호함 둘 다를 잡고 싶어 우왕좌왕, 우물쭈물하면서 정작 둘 중 하나도 잡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친절하며 단호한’ 태도를 고작 저런 식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고 그 본뜻을 파악하지 못하는 조 교수에게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친절하며 단호한’이라는 문구는 그렇게 가볍게 나온 게 아닙니다. 초등교육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학급긍정훈육법(Positive Dicipline in the Class) 그리고 육아 분야에서도 널리 알려진 긍정 훈육(Positive Discipline)의 핵심 철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에게는 ‘미움받을 용기’로 유명한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와 그의 제자인 루돌프 드레이커스(Rudolf Dreikurs)의 민주적 육아 및 교육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친절하며 단호한’이라는 문구는 이미 미국 교육과 육아 분야 전반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인 겁니다. 이 표현의 기원이 어딘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섣불리 본인이 생각한 바대로만 협소하게 해석한 것에 실망한 것이 첫째요, 조 교수의 전문 분야인 육아 교육 전반에 널리 알려진 이 표현을 모르고 있다는 것에 실망한 것이 둘째입니다. 그러니까 조 교수는 ‘친절하며 단호한’이라는 표현 자체를 사실상 모르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조 교수의 책도 몇 권 읽었고, 그가 나온 인터뷰 등도 많이 보았고, 심지어 강연에도 가 본 적이 있습니다.
친절하며 단호하다는 건
그럼 대체 친절하며 단호하다는 건 뭔가요? 제가 다른 글에서 적은 게 있어 잠시 그 내용을 빌려오겠습니다.
“일단 친절하며 단호하다는 건, 쉽게 말해 ‘감정’에 친절하고, ‘행동’에 단호하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학교 동아리 활동으로 아이들이 교실에서 요리를 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준비물 중 하나인 케첩을 갖고 친구들을 향해 총 쏘는 흉내를 냅니다. 그러다가 실수로 진짜 케첩이 발사돼 친구 옷에 묻었습니다.
이때 친절하기만 한 교사라면 어떻게 할까요? 아마도 아이를 달래는 걸로 끝낼 겁니다.
“에고, 괜찮아, 괜찮아. 친구한테 장난치려다가 실수로 그럴 수 있지. 다음부터 조심하면 돼.”
아이의 마음은 충분히 공감받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자기 잘못에 책임을 지지 않아요. 아이는 이 정도의 잘못은 그냥 해도 되는 거구나, 생각할 겁니다.
반면 단호하기만 한 교사는 어떨까요? 아마도 호통을 치거나 화를 내겠죠.
“곽노근, 지금 뭐하는 거야? 선생님이 먹는 거로 그런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 몇 번을 얘기해야 알겠어? 몇 번을!! 네가 친구 옷 다 물어줄 거야?!”
아이는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긴 알겠지만(모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은 충분히 공감받지 못했기 때문에 내면에 울분이 가득 찹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 때론 책임을 전가하기도 합니다. 애꿎게 옆에 아이한테 책임을 돌리기도 하고, 선생님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친절하며 단호한 교사는 어떨까요? ‘감정’에 친절하지만(곧 공감해 주지만) ‘행동’에는 단호합니다.
“노근아, 실수로 그런 거 알아. 노근이도 놀라고 당황스러웠지? 그렇지만 케첩이 묻은 혜림이는 어떤 기분일까? 혜림이한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지, 혜림이한테 사과하고 혜림이 옷에 묻은 건 네가 최선을 다해 지워줘야 해.”
그러고 나서 화장실에 가서 지울 수 있는 만큼 지울 수 있게 합니다. 어쩌면 정말로 친구 옷을 물어줘야 할 수도 있음을 알려줍니다. 아이 마음에 공감해 주되, 아이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건 반드시 일러주고 책임지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찌 보면 뻔한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이렇게 ‘친절하며 단호한’ 태도로 아이를 대하는 교사는 생각만큼 많지 않습니다. 아이의 잘못부터 지적하고 꾸중으로만 일관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항상 먼저 해야 할 건 감정에 대한 ‘공감’입니다. 당연히 ‘공감’으로만 끝내서는 안 됩니다. 놓치지 않고 해야 할 건 ‘꾸중’이 아니라 행동에 대한 ‘단호함’입니다.
네가 잘못한 행동에 있어서는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행동에 대한 단호함’. 잘못된 행동을 알려주고 책임지는 행동을 할 수 있게끔 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단호함. 그러나 윽박지르거나 화내지 않는 단호함.
우리 아이 감정은 읽어주셨나요?
먼저 감정에 공감을 해줘야 한다고 하니 많은 선생님께서 반감부터 가지실 것 같습니다. 아이의 잘못을 보호자에게 알리자, “우리 아이 감정은 읽어주셨나요?”라고 말하는 못난 보호자의 몹쓸 방어기제가 우리 교사의 심장을 찔렀던 직간접적 기억. 그 기억은 우리 교사들로 하여금 감정 읽기를 꺼리게 만들었지요.
정말 못난 일부 보호자들 때문에요. 그렇게 말한 본인들은 우리 교사들 마음은 먼저 읽어주고 그런 말 했던가요? 본인들도 전혀 실천하지 못하는 감정 읽기를 교사에게 강요하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건가요.
선생님들이 감정 읽기에 대해 노이로제에 가까운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이해는 됩니다. 2023년 서이초 사건 이후로, 아니 그 전부터 우리는 몇몇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감정 읽기 트라우마입니다. 하도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일어나니, 감정 읽기는 사치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합니다.
친구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아이, 심지어 선생님을 때리는 아이에게 감정 읽기가 웬 말인가요. 교실 수업시간에 괴성을 지르고 친구에게 연필을 휘두르고 선생님 앞에 드러누워 핸드폰으로 교사를 촬영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는 아이에게 무슨 놈의 감정 읽기인가요.
그럼에도 힘겹게 얘기합니다. 감정 읽기는 필요하다고요.
이 세상 교실에는 그런 아이만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는 감정을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쌓인 불같은 화가 눈 녹듯 스르륵 사라지니까요.
사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몇 막돼먹은 아이들한테도 감정 읽어주기는 필요하다고 한다면 너무 나간 걸까요? 그럼에도 저는 감정 읽기가 사실은 모든 아이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아이들의 감정을 읽어주는 것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감정‘만’ 읽어주는 데 있지요. 감정만 읽어주고 자기가 한 잘못된 행동에 책임지게 하지 않는다면 아이는 자기 행동을 되돌아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감받았으니 내 행동은 해도 되는 행동이구나’ 하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줘 버립니다.
친절함과 단호함, 둘은 조화롭게 함께여야 합니다. 조 교수의 말처럼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시간차를 두고 함께 나타나야 합니다. 감정에 대한 공감 먼저, 잘못된 행동에 대한 단호함 나중에. 물론 때에 따라 순서는 바뀔 수 있겠지만요.
감정 읽어주기, 왜 필요한가
감정 읽어주기, 곧 공감하기는 왜 필요할까요?
첫째, 아이의 감정을 공감해 준다는 것은 곧 그 아이를 존중해 주는 것이니까요. 아이를 존중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으니까요.
존중받는다고 느끼는 아이는 자존감이 올라갈 겁니다. 자존감이 올라간 아이는 결국 이 세상에 주체적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겁니다. 그 자체로 교육자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이 감정에 대한 존중이지, 아이가 한 잘못된 행동에 대한 존중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줄이고 문제해결을 더 쉽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행동을 일으키는 아이를 보면 한바탕 큰소리로 샤우팅을 해버리고 싶은 마음, 교사로서 솔직히 많이 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큰소리 치고 나면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휘감아 은근히 꿀꿀하고 우울합니다. 때로 자괴감도 들고요. 게다가 내 샤우팅에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는 척이라도 하면 다행이지만 간혹 더 반항적으로 나오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그렇다면 감정 읽어주기가 문제해결을 더 쉽게 해 주는 것이 사실일까요?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씩씩거리던 아이도, 분노로 똘똘 뭉쳐 있던 아이도, 감정을 읽어주면 일차 저지선이 한 커플 벗겨지니까요.
아주 드라마틱하게 벗겨지진 않더라도 서서히 누그러집니다. 그러면서 교사와의 불필요한 감정 소모는 줄어들고 이내 아이는 교사의 말이 귀에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 화가 누그러지면 자기 잘못도 순순히 인정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이 감정 읽기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행동에 대한 단호함, 즉 아이가 잘못한 행동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공감만 주구장창 했을 때 그 공감은 언젠가부터 힘을 잃어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니까요.
감정은 죄가 없다(Feelings are not wrong)
감정은 죄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이의 감정을 공감해 줘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심지어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분노’도, 그런 감정을 가진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어찌 보면 감정이 생기는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난 그 자체만 가지고 죄가 되는 건 아닙니다.
문제는 ‘행동’입니다.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분노’라는 감정을 넘어, 실제 ‘누군가를 해치는 행동’은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해를 끼치는 행동은 절대 해서는 안 되며 단호하게 교정되어야 합니다.
‘감정’과 ‘행동’은 분리되어야 합니다. 그런 ‘감정’이 든 것 자체는 수용하고 존중해 줘야 하지만 ‘행동’에 있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내 행동으로 누군가 피해를 입었다면, 그에 따른 책임은 명백히 져야 합니다.
“네가 친구를 때리고 싶을 만큼 화난 건 알겠어. 누구나 그런 감정을 가질 때가 있어. 그러나 그렇다고 진짜로 친구를 때리면 안 되는 거야. 그건 절대 안 되는 행동이야.”
더 구체적인 얘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