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에듀 | 현직을 떠난 지 벌써 3년이 되었다. 필자는 더 이상 교장실에 앉아 있지 않다. 몇 해 전과 같이 매일 아침 교문 앞에서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생활기록부와 회의 자료에 둘러싸여 하루를 시작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교육계를 떠났다고 해서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걱정까지 내려놓을 수는 없다. 오히려 학교를 떠난 지금, 우리 교육의 현실이 더 또렷이 보인다. 아이들은 여전히 바쁘고, 여전히 외롭다. 성취를 요구받기만 하지 실패할 권리는 허락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지만 깊이 고립되어 있다. 수십 년간 학교에서 아이들의 웃음과 눈물과 고통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오늘의 교육이 너무 오래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만을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돌이켜보면, 정작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충분히 응답하지 못했던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늦었지만 이제는 꼭 말하고 싶다. 청소년에게 삶(well-being)을 가르치려면, 죽음(well-dying)에 대해서도 함께 말해야 한다고 말이다. 죽음을 교육의 영역으로 들여오는 일은 여전히 불편하게 여겨진다. 아직 어리다고 아이들을 평가절하하기 전에, 아이들은 이미 죽음을 알고 있다. 뉴스에서, 온라인에서, 때로는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을 통해 예고 없이 마주하고 있다. 다만 그 경험을 정리하고 의미화할 어른과 언어가 없을 뿐이다. 학교마저 죽음에 대해 침묵할 때, 아이들은 이를 혼자 견뎌야 할 것이다. 현직 교장, 교감, 평교사 시절, 위기 상황에 놓인 아이들을 수없이 만났다. 그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 있다. “선생님,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요.” 그 말속에는 성적도, 진로도 아닌 삶 자체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질문에 얼마나 정직하게 응답했는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삶과 죽음을 함께 다루는 교육은 아이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한함을 인식하게 하고 사고의 폭을 넓혀 보다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해외 연구와 실제 교육 사례는 죽음에 관한 교육이 청소년의 생명 존중 의식과 정서적 회복력을 높인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는 그것을 연구 보고서가 아니라, 아이들의 변화된 눈빛에서 직접 보았다고 고백하고자 한다.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학교는 곧 삶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말할 수 있는 학교다. 그런 학교에서 아이들은 실패를 끝으로 여기지 않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생명 존중 교육과 죽음 교육은 자살 예방을 넘어,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붙잡을 힘과 인간 존엄 사상을 기르는 과정이다. 원로 교육자로서 더 이상 정책을 집행할 권한도, 학교를 운영할 직책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책임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믿는다. 말해야 할 때 말하는 것, 그리고 아이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교육은 제도 이전에 태도이며, 지식 이전에 사랑이다. 아이들의 삶을 진심으로 아끼고 존중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불편함 뒤에 숨지 말아야 한다. 삶의 기쁨만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침묵하는 교육은 결국 아이들을 홀로 두는 일이다. 때로는 교실에서, 수업에서 버킷리스트 작성 교육을 병용해 보라. 과거 독일 대학은 철학 시간에 이를 입증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적어보라 했더니 한참이나 망설이던 학생들이 내일이면 생을 마감한다고 가정하고 하고 싶은 일을 적어보라고 하자 종이 위를 까맣게 채웠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교육계의 서사이다. 필자는 이제 교육의 현장 한 발짝 밖에서 부탁하고자 한다. 학교가 보다 아이들의 삶 한가운데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삶을 온전히 가르치기 위해, 죽음도 함께 이야기하는 용기를 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이들은 마냥 보호받아야 할 사랑스러운 존재이지만, 삶을 스스로 살아갈 준비가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에듀 | 최근 두 명의 고등학교 남학생이 수업 시간에 떠들다가 교원과 발생한 상황 그리고 이를 교무실에서 훈육한 사건에 대해 상담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수업 시간 교실과 쉬는 시간 교무실에서 각각 7~8분, 총 15분 동안 일어난 상황일 뿐인데, 학교폭력, 교육활동 침해, 학생생활교육, 학생인권옹호관까지 소환되는 혼란의 도가니입니다. 교육전문가들은 학교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해결하겠다며 지난 십여 년 간 관련 법령을 세분화했지만, 이는 전혀 체계적이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학생징계(학생생활교육)에서 학교폭력이 분리되고, 학생 인권이 추가되고, 반작용으로 다시 교육활동 침해(교권침해)와 교원의 생활지도권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현재의 학교가 혼란에 빠진 모습을 드러내고 해결방안을 제시해 보려고 합니다. 교실+교무실, 총 15분간의 행동을 시간 순서로 재구성 <교실> 남학생 A와 남학생 B는 담임의 수업 중 옆 반 B의 전 여자친구 C에 대해서 속닥거립니다. B는 A에게 ‘C와 헤어졌어’라고 말합니다. A는 B에게 ‘그럼 이제 C를 내가 가진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B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 아이들이 다 들리도록 외칩니다. “선생님, A가 C를 가진대요.” 담임은 반 학생들이 모두 듣도록 “A야, 그건 성희롱이야, (경찰) 신고감이다. 네가 그 학생을 가지고 싶다는 거냐? 그 학생이 들으면 기분 나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이거 듣고 기분 나쁜 사람들은 경찰에 신고해라”라며 담임은 어수선한 상황을 정리한 후 수업을 이어갔고, 수업 종료 후 A와 B를 불러 교무실로 따라오라고 합니다. <교무실> 담임은 교무실에서 A와 B로부터 설명을 듣습니다. 설명이 끝난 후 담임은 “너희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지?”라고 말합니다. 이에 A는 “네, 제가 아까 수업 시간에 떠든 것은 잘못이 맞는데요. 그런데 선생님, 그걸 가지고 (경찰에 신고하라고) 굳이 애들 다 듣도록 크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지 않았나요?”라고 말합니다. 담임은 “뭐라고?”라고 말합니다. A는 계속 이어 말합니다. “선생님이 사과하실 생각 없으시면 저도 경찰에게 전화할게요”라며 핸드폰을 꺼냅니다. 옆에 있던 학년부장이 “일단 진정하고, 아버지에게 먼저 전화드리렴”하고 말합니다. A는 “제가 왜 아빠에게 전화를 해요? 이거 명예훼손이잖아요”라고 대응합니다. 학년부장은 담임이 교육 목적에서 말씀하신 거라고 설명합니다. 이에 A는 “교육적인 목적으로 법을 어기는 게 상관없으면 경찰관한테 전화하면 되겠네요!”라며 강하게 나옵니다. 쉬는 시간이 끝나며 대화는 중단되고 학생들은 교실로 돌아갑니다. 학생과 보호자에게 지옥이 시작되다 [학교폭력] 담임은 학교폭력예방법 제20조에 따라 A를 가해자로 신고합니다. 학교 전담 기구 조사에서 처음 들은 여학생 C는 “가진다”라는 표현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표현이 아니므로, 학교폭력으로 신고할 의사가 없다고 <학생확인서>를 작성하여 제출합니다. A도 별도로 C에게 사과합니다. 이에 A는 ‘학교폭력 아님’으로 종결될 줄 알았으나, 전담 기구는 학교폭력으로 인정하고 학교장 종결로 마무리합니다. 이의를 제기했으나 학교 전담 기구의 판단은 ‘행정처분’이 아니므로 이의 처리 절차가 없다는 설명을 교육청으로부터 듣습니다. [교육활동 침해] 담임은 교무실에서의 경찰에게 신고하겠다고 말한 것은 “협박”이라며 교원보호위원회에 신고합니다. A는 선생님에게 사과할 부분이 분명 있지만, 선생님도 A에게 망신 준 것을 사과해야 한다며 이를 교권보호위원회에 가서 설명하여 사과를 받겠다고 합니다. 일단 A는 담임에게 사과문을 제출했고, 담임이 이를 수용하여 [사안종결확인서]를 작성하고 ’학교장 자체해결’로 교육활동 침해에서는 처분 없이 종결합니다. [생활교육위원회] 담임은 교육활동 침해를 종결시키는 대신 A를 생활교육위원회에 회부합니다. 수업 시간에 속닥거리는 행위가 있었으니 “교사의 정당한 교육 활동을 침해하고 수업 분위기를 저해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학교는 보호자 고지 없이 A로부터 <학생자기변론서>를 제출받고, 작성 당일 학생을 통해 보호자에게 ’학생생활교육위원회 출석 및 의견제출 요청서’를 보내 다음날 회의에 참석하라고 통지합니다. 학생과 보호자의 반격이 시작되다 여기까지만 해도 2개월이 넘게 사건이 진행되었습니다. 이제 A와 보호자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미성년자의 보호자에게 고지도 없이 <학생자기변론서>를 작성한 것도 의심스러운데, 작성 당일 회의 통보를 고지하고 다음 날 출석하라고 하는 것에 화가 나 반격을 합니다. [학생인권옹호관] A의 보호자는 학생인권옹호관에게 교원이 같은 반 친구들 앞에서 A에게 망신을 줬다며 인격을 침해하는 부적절한 교육행위임을 신고하고, 생활교육위원회 참석 공문을 보호자에게 하루 전에 주는 것도 인권침해는 아닌지 민원 또한 접수합니다. 또한 교원의 폭력적인 행정 집행에 대해 교원을 가해자로 지목해 [학교폭력]으로 신고합니다. 최초의 학교폭력 신고 또한 여학생 C에게 확인조차 없이 신고부터 한 점과 B가 피해자임을 A에게 고지하지 않은 점, 정작 여학생 C가 성희롱이 아님을 적극 의사표현하고 있는 점 등을 통해 전담 기구를 다시 개최하여 A의 행위에 대해 ’학교폭력 아님’으로 변경해달라고 교육청에 민원을 제출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A의 보호자는 그 밖의 절차들이 타당한지 감사를 요구하며 학교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집니다. 20여년간 수십번의 제개정, 더욱 큰 혼란만 증폭시키고 있다 학생 징계와 관련해 [1949년] 신설한 교육법 제76조에서 교육상 필요한 때에 학생에게 징계 또는 처벌을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며, 학생의 징계에 관한 내용은 1997년 초·중등교육법으로 전면 개정되어 초·중등교육법 제18조로 옮겨왔고, 이를 근거로 전) 선도위원회, 현) 학생생활교육위원회가 만들어졌습니다. [2004년] 학교폭력예방법이 만들어지고, 2013년 피해 학생 보호 강화 등이 변경됩니다. 이때에도 학생징계와 학교폭력 대상을 구분하지 못하여 혼란스러웠습니다. [2016년] 교원지위법에 교육활동 침해행위가 신설되고, 초·중등교육법 에는 학생을 처벌할 뿐 교원에 대한 보호조치는 없었기에 교육활동보호센터가 신설됩니다. [2022년] 초·중등교육법 제20조의2 (학교의 장 및 교원의 학생생활지도)라는 조항이 신설되며 지도(조언, 상담, 주의, 훈육, 훈계 등)의 구체적 방법이 설명됩니다. 특히 훈육에는 “학생이 교육활동을 방해하여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 보호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분리지도(교실 밖/가정학습) 할 수 있다”가 고시되었습니다. [2025년] 초·중등교육법 제20조의2의 추가 개정으로 교육활동 중 학생의 과다한 행위에 대해 방어 및 보호를 위한 제지를 할 수 있다는 조항 등이 신설되었습니다. 이렇게 법은 계속 개정되었지만, 학교 구성원 중 아무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경기교육청의 2025 학생생활규정 운영매뉴얼 P.141 선도의 기준에는 “수업 시간 중 지속해서 소란을 일으키는 행위, 부적절한 언행을 한 학생”이 여전히 있습니다. 이 문구와 초·중등교육법 제20조의 2 및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에 언급된 “학생이 교육활동을 방해하는 행위”, 교원지위법 제19조의 “교원의 교육활동을 침해하는 행위”가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그보다 더 묻고 싶은 것은, 불과 15분 동안 일어난 학생과 교원 간의 행위를 분단위로 쪼개어 세 가지 법 조항을 각각 적용하는 것이 과연 학교 구성원이 바라는 목표에 도움이 되는 걸까요? 교원지위법/ 초·중등교육법을 행정법 체계에 맞게 정비하자! 우선, 학생의 징계와 생활지도, 교원지위법에 대한 체계를 통합해 교원의 지도행위를 행정법 체계에 맞춰 재구조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행정기본법에서 처분이란 행정청이 구체적 사실에 관하여 행하는 법 집행으로서 공권력의 행사 또는 그 거부와 그 밖에 이에 준하는 행정작용을 말합니다. 행정절차법 제21조는 처분을 위해서는 사전통지를 의무로 정하면서, 단서조항으로 긴급하다면 처분을 선행한 후, 나중에 사유를 알릴 수 있도록 정합니다. 이를 학교에 적용하면 교원의 훈육(분리지도)는 ’긴급처분’입니다. 따라서 행정절차법에 따라 교원이 선조치할 수 있는 권한으로 정립하면 됩니다. 단 학생이 억울하다며 이의신청을 한다면 조치 후 그 사유를 설명을 들을 권리 또한 행정절차법과 같아야 합니다. 교장의 지도(교실 밖, 가정지도) 또한 학생의 권리를 제한하는 ’처분’입니다. 교원의 긴급처분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교장이 지도해야 한다면 생활교육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통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행정절차법에서 말하는 청문에 해당하는 절차입니다. 생활교육위나 전담 기구가 통합되어 교원과 학부모가 같이 하는 것도 고민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교장이 가정교육을 시키거나, 학교 밖의 시설로 위탁을 보낼 때 보호자의 동의를 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징계가 곧 행정처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관련법을 정비하여 보호자까지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다음은, 교육 법령에서도 피해자보호법과 가해자처벌법의 분리를 제안합니다. 가해자 처벌은 ’형법’, ’아동학대처벌특별법’, ’성폭력처벌법’등이 있고, 피해자 보호는 ’범죄피해자보호법’, ’아동복지법’과 ’성폭력방지법’ 등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육활동 침해의 피해자 보호는 교원지위법에서 하지만, 가해자 처벌은 초·중등교육법에서 두 가지, 교원지위법에서도 한 가지인 삼중 구조를 가집니다. 이를 모두 단일화하고, 피해자인 교원을 보호하는 것만 교원지위법에서 하면 됩니다. 사실 저는 학교폭력도 학부모가 포함된 생활교육위원회로 단일화하고, 학교폭력예방법은 피해자보호법으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절차와 양형 기준의 명확한 공개도 필요합니다. 학교폭력에 이어 교육활동 침해도 생기부 기재가 검토되고, 추후 학생징계 및 훈육(분리지도)도 입시에 반영시키겠다는 말이 나올 추세입니다. 입시에 반영된다면 양형 기준은 분명 전국이 오차범위 내에서 동일해야 합니다. 사법도 양형 기준을 공개하고, 행정도 처분에 대한 처분 기준을 공개합니다. 하지만 현재 교육부는 관련된 모든 매뉴얼을 비공개합니다. 교원/장학사는 ’교육’이어서 비밀이라 주장하지만, 학교 안에서 끝나지 않고 학교 밖에서 권리의 침해 및 의무의 부과로 사용된다면 이제 ’처분’으로 인정한 후 양형 기준을 만들고 공개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학교 구성원 인권위원회로 통합합시다. 사법의 장점은 한 재판에서 본소(A가 B에게)와 반소(B가 A에게)를 통합하는 점입니다. 학생 간의 분쟁인 학교폭력은 현재 통합심의가 가능하지만, 교육활동 침해는 학생은 학교폭력심의위원회나 인권옹호관을, 교원은 교권보호위원회를 통해 처리해야 합니다. 학생 생활 교육은 또 다른 절차이고, 보호자에 대한 처분 권한이 없습니다. 교육이라면 당사자들의 입장을 동시에 듣고 양쪽에 적절한 양형을 양쪽에 부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의 사건을 분 단위로 쪼개어 판단하지 말고, 양쪽이 말할 수 있는 기회가 공정히 부여되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합니다. 마무리하자면, 초·중등교육법은 교육자치로 전환되면서 많은 권한 관계가 뒤엉켜 있습니다. 중앙정부의 권한이 교육감을 거치지 않고 학교장에게 바로 가거나, 교육감을 거치지 않고 교육장에게 가기도 합니다. 패스가 되어버린다면 상급기관은 하급기관을 지도할 권한이 없습니다. 조례로 정해야 할 일과 학칙으로 정해야 할 일, 학교장이 정할 규정과 학운위를 통해 정해야 하는 규정이 뒤엉키며 법에서 위임받은 지침과 아무 근거 없이 예시로 만들어진 지침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제 교원들과 입법자들은 사건마다 대응한다며 법을 누더기로 만들지 말고, 교육 관련 법령을 행정법 체계에 맞춰 통합 정비할 것을 제안드립니다.
더에듀 | 국민은 국가의 주인으로서 선거를 통해 대표를 뽑고 권력을 위임한다. 따라서 국민은 자신이 위임한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또한 국가는 다수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국민이 국가 운영의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을 때 국민주권이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실은 ‘정치적 중립’이라는 덫에 걸려, 유권자로서 정치적 공론장을 경험하며 정치적 통찰력과 철학을 학습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 학교 교육의 주된 목표는 민주시민교육이다. 정치는 국민의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적 중립’이라는 프레임이 교육에 씌워지면서 정치는 금기의 영역이 되고 있다. 정치에 대한 판단은 사법부가 담당하고, 비평은 정치인과 평론가가 담당한다. 나머지 국민들에게 정치는 말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고 체면이고 예의가 되었다. 공론의 장에서 끊임없이 토론으로 이어져야 할 정치가 지극히 비밀스러운 사적 영역처럼 치부되고 있다. 히틀러는 “지배자에게 대중이 생각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교실에서 교사의 정치적 중립이 아이들이 생각하기를 멈추게 만들고 있다. 정치는 집단지성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선거는 시민 권력이 시민 대표를 선출해 권력을 위임함으로써 국가권력을 탄생시키는 과정이다. 나의 이익이 아니라 국익의 관점에서, 나의 대표가 아니라 우리의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시민 권력은 더 좋은 권력을 탄생시키기 위해 정보를 교환하고, 토의하고, 논쟁해야 한다. 그리고 각자 투표소에서 자신의 양심과 소신에 따라 한 표를 행사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한 표의 행사는 보장하되, 그에 전제되어야 하는 토론의 과정은 극도로 억압하고 있다. 다수결의 원칙에서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충분한 대화와 토론인데 말이다. 현실 정치에 대한 정규 교육은 부재하고 그 자리를 유튜브나 SNS, 또는 사이비 종교와 몇몇 비밀 조직이 대신하고 있다. 아이들은 누군가를 조롱하고 폄훼하는 등 자극적이고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정체불명의 밈과 쇼츠 영상을 통해 정치를 배운다. 그리고 그것의 대부분은 일베적이고 파시즘적이다. 심지어 일본의 입장에서 일제강점기를 정당화하고, 초등학생들은 놀이처럼 전직 대통령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며, 중학생이 되면 소수자를 혐오하고 조롱하는 파시즘적 성향을 보인다. 독재자를 영웅시하고 심지어 히틀러를 존경한다. 아이들은 이렇게 사적인 영역에서 거짓과 조롱과 비하가 가득한 현실 정치를 접하는데, 공교육은 ‘정치적 중립’을 준수하느라 그 어떠한 언급도 금지되고 있다. 경제교육에서는 실생활과 밀접한 금융교육을 강화하는 것과는 달리, 정치 교육은 반대로 가고 있다. 현실 정치는 철저히 금지되고 아이들은 대통령 이름만 언급해도 ‘정치적 중립’을 의심한다. 가장 큰 문제는 지금의 ‘정치적 중립’이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억압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 전체적으로 ‘표현의 자유’와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보다 적극적으로 보장된다면, ‘정치적 중립’에 대해서도 더 포용적인 문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지나치게 모호하고 포괄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교육기본법에서의 정치적 중립에 대해서도 공직선거법에서와 같이 금지 사항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면 교실에서의 정치 수업도 지금처럼 현실로부터 동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초등학생들도 주식에 투자하며 현실 경제를 배우듯이 정치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배웠으면 좋겠다. 뉴스를 보고 정치적 이슈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토론하고, 팩트체크하고 선동가의 궤변을 가려내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와 가까워졌으면 좋겠다. 사실의 축적이 진실의 발견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통찰과 철학이 있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공교육의 역할이 가장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가 금기시되는 사회는 틀림없이 민주주의에 위협적이다. 정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숨을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더에듀 | 우리는 흔히 성공을 이야기하면서 실패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부끄러워한다. 때로는 실패를 죄악시하며 감추려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성공만이 가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패 없이 얻은 성공만이 자랑스러운 것일까? 아니면 수많은 실패 끝에 얻은 성공만이 진정한 성취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진다. 인간은 성공만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고, 실패만을 경험하라고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생은 다양한 체험을 통해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하며, 중요한 것은 성공과 실패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떤 존재인지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성공과 실패로 인생을 평가하는 것에 반대한다. 잘 살았다, 못 살았다, 행복하다, 불행하다라는 단정은 삶을 단순화한다. 인생을 잘 사는 방법은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직접 부딪혀 깨닫는 데 있다. 성공이든 실패든 그 경험이 나를 성장시키는 과정이 더 본질적이다. 결국 결론은 하나다. 인생에는 실패할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더 깊은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다. 정답 없는 질문이기에 실패는 나를 성숙하게 하는 밥이자 보약이다. 많은 사람이 실패를 두려워한다.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 때문이거나, 도전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패할 용기를 가진 사람은 실패가 주는 큰 복을 놓치지 않는다. 결국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며 성공만을 바라보고 살 것인가, 아니면 실패할 용기를 가지고 도전하며 인생의 진짜 진실과 행복을 누릴 것인가. 인생은 정답이 있는 시험지가 아니다. 실패와 성공은 단지 과정일 뿐, 그 속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성장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삶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은 오직 나의 선택과 용기에 달려 있다. 실패할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인생의 풍요로움과 행복을 맛볼 수 있다.
더에듀 김연재 수습기자 | 국내 최대 교사 주도 어린이책 연구 공동체 ‘좋아서하는어린이책연구회(좋어연)’가 지난 14일 서울 홍대 청년문화공간JU에서 2025년 송년회를 성황리에 개최했다고 19일 밝혔다. 송년회는 ▲2025년 좋어연 결산보고 ▲2025 좋어연의 1년 돌아보기와 같은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진행됐다. 특히 참가자들이 각자 사랑하는 그림책 한 권을 나누는 그림책 교환 게임이 큰 호응을 얻었다. 행사에 참여한 좋어연 정회원 초등교사 A씨는 “좋어연은 저에게 나들목 같은 존재”라며 “한 방향으로 막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시기에 총회, 소모임, 수업공개, 연수 강의, 수업자료 나눔, 오프라인까지 이어진 경험을 통해 다양한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정회원 B교사는 “좋어연과 함께 한 시간은 단단한 교육철학을 공유하고 배움을 이어가는, 교사로서 다시 힘을 얻는 순간들이었다”고 밝혔다. 좋어연은 올해 ▲좋어연 어린이책 대축제 ▲전국 16개 동네책방과 협업한 좋어연 X 동네책방 봄소풍 등의 행사를 열었고 ▲‘동화수업 대백과 261’을 출간했으며 ▲아이스크림연수원의 ‘현아샘과 좋어연의 문해력 쑥쑥 동화수업’ 15차시 강좌 개설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 왔다. 이현아 좋어연 대표는 “앞으로도 어린이책이라는 가장 단단한 매개를 통해 교사들이 연결되고 성장하는 통로가 되겠다”며 “2026년에는 더욱 확장된 어린이책 대축제와 연구 활동으로 교육 현장과 사회에 기여하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좋어연은 교사 주도의 연구와 실천을 바탕으로 어린이책 문화 확산과 수업 전문성 강화를 목표로 어린이책 기반 교육 콘텐츠를 나누는 전문적 학습공동체이다. 독서교육, 그림책 수업, 동화 및 그림책 집필, 칼럼, 번역, 기획, 온라인 연수 콘텐츠 제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더에듀 전영진 기자 | 감사원이 인공지능(AI) 디지털교과서(DT) 감사 보고서를 통해 충분한 시범사업과 교육현장 검증 없이 도입했다고 판단한 가운데, 초등교사노동조합(초등노조)이 교육정책 전면 도입 전 시범사업과 현장 검증 의무화의 법제화를 요구했다. 감사원은 지난 17일 감사보고서 공개를 통해, 일정 촉박을 이유로 시범 운영을 생략하고 현장적합성 검토로 대체했다고 판단했다. 또 AIDT 개발을 위한 기술 규격과 기준을 충분히 마련하지 않고 검정 공고를 실시해 기준 없이 개발한 발행사들이 기준 제시된 이후 재설계에 나서게 한 것도 문제 삼았다. 구독료 역시 시도교육청 보통교부금 부담으로 하면서 교육청들과 충분한 협의를 진행하지 않았다고 문제 삼았다. 이에 초등노조는 감사원의 AIDT 감사보고서에 나타난 것은 특정 정책이 아니라 교육부의 반복적 행태라고 꼬집으며 (가칭)이주호 방지법 제정을 국회에 촉구했다. 이들은 19일 입장문을 통해 “졸속 시범-전면 도입-현장 부담 전가‘ 방식의 전형적인 사례”라며 “정책 결정 단계에서는 현장 교원의 검증과 전문가 의견이 배제되고 시행을 앞두고 문제를 인식하는 구조가 고착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학생맞춤통합지원과 늘봄학교 등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는 것. 그러면서 “실패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 교육정책의 전면 도입을 제도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입법적 안전장치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시범사업과 최소 기간 현장 검증 의무화 ▲시범사업에 실제 수업 적용과 현장 평가 포함 ▲교사 의견 반영 ▲시범사업 결과와 현장 검증 내용 공개 보고 ▲국회 보고 절차 의무화 등의 내용을 담은 법제화((가칭)이주호 방지법)를 요구했다.
더에듀 | 학생맞춤통합지원, 이른바 ‘학맞통’을 둘러싼 논쟁은 겉으로는 업무 부담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더 깊은 인식의 오류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학맞통을 ‘교육복지 확대 정책’ 정도로 오해하는 시선은 제도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학맞통은 새로운 일을 얹는 정책이 아니라, 이미 학교 안팎에서 분절적으로 수행되던 역할과 기능을 통합·재구조화하는 법정 체계다. 그동안 학교 현장에서 학생에게 어려움이 발생하면 대응은 늘 사후적이었고, 동시에 조각났다. 학습 부진은 기초학력 담당에게, 정서 문제는 상담교사에게, 가정 형편은 교육복지사(담당자)에게, 건강 문제는 보건교사에게, 위기 상황은 외부 기관에 각각 넘겨졌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지원이 연속되지 못하고, 정보는 단절되며, 책임은 분산됐다. 같은 학생을 두고도 부서는 달랐고, 기록은 흩어졌으며, 지원의 목표는 공유되지 않았다. 이로 인한 비효율은 결국 학생에게 전가됐다. 학맞통은 바로 이 분절 업무에 따른 구조적 비효율을 해소하기 위해 마련된 재구조화 정책이다. 학맞통은 특정 부서나 직군에 업무를 몰아주는 제도가 아니다. 오히려 학생을 중심에 두고, 흩어져 있던 지원 기능을 하나의 체계 안에서 연결하는 방식이다. “누가 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의 문제로 관점을 전환하자는 제도적 선언이다. 여기서 반드시 짚어야 할 점이 있다. 학맞통은 임의적 정책이 아니다. 이는 법률에 근거한 법정 책무이다. 이미 국회는 학생의 학습권과 발달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와 교육청, 학교의 책임을 명문화했다. 그럼에도 이를 여전히 ‘선택 가능한 사업’이나 ‘일시적 유행 정책’쯤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법치 행정에 대한 오해이자, 공교육의 책무성에 대한 인식 부족이다. 교사의 고유 업무에 대한 오해도 바로잡아야 한다. 교사의 본질적 역할은 교과 지도와 행동발달 지도에 있다. 이는 단순한 지식 전달을 의미하지 않는다. 학습 결손, 정서 불안, 문제 행동은 교과 지도와 분리된 외부 영역이 아니라, 교육 활동의 핵심 영역이다. 학맞통은 교사의 역할을 비대화하는 제도가 아니라, 교사가 본래 수행해 온 교육적 책임을 혼자가 아니라 체계 속에서 수행하도록 돕는 구조이다. 특히 학맞통을 ‘교육복지’로 축소하는 인식은 가장 위험하다. 학맞통이 포괄하는 지원 범위는 단선적 복지가 아니라 다차원적 통합 지원이다. 학습 지원 영역에서는 기초학력 보장, 보충학습, 맞춤형 학습 프로그램이 연계되고, 경제 지원 영역에서는 급식비, 방과 후 프로그램, 장학금, 교재비 지원을 통해 학습 접근성을 확보한다. 정서·심리 지원은 상담과 위기 중재, 심리 치유로 이어지고, 건강 지원은 신체·정신 건강 관리와 의료 연계로 확장된다. 사회적 지원 영역에서는 가정·학교·지역사회의 연계, 또래 관계 회복, 지역 자원 활용이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기능이 각각 따로 존재할 때가 아니라, 하나의 체계로 엮일 때 비로소 효과를 낸다는 사실이다. 학맞통은 이 연계를 제도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장치다. 이는 브론펜브레너의 생태학적 인간 발달 이론에 기반한 접근이기도 하다. 아동과 청소년의 발달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가정, 학교, 지역사회, 정책 환경이 상호작용하는 생태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다. 학맞통은 이 상호작용을 방치하지 않고, 제도 안으로 끌어들인 결과다. 결국 학맞통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은 “교사의 업무가 늘어났는가”가 아니다. 분절된 지원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통합된 체계로 재구조화할 것인가의 선택이다. 학맞통은 교사를 옥죄는 제도가 아니라, 학교가 더 이상 고립된 섬이 되지 않도록 하는 연결 장치이다. 오해를 걷어내고 구조를 보아야 할 때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감정적 반발이 아니라, 법과 제도의 취지를 이해하는 성숙한 인식 전환이다. 학맞통 시범교육지원청 실무자로서, 제도가 현장에 안정적으로 착근되기를 기대한다.
더에듀 정은수 객원기자 | 지난해 독일의 공교육비가 7% 증가해 1980억유로(약 340조원)로 늘은 것으로 나타났다. 독일 통계청은 11일 이런 내용을 포함한 2025년도 교육재정 보고서(Bildungsfinanzbericht)를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명목상 교육 예산 지출은 130억유로(약 23조원) 증가했다. 2023년도와 비교해 7% 증가했다. 다만,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조정액 기준으로는 4%, 50억유로(약 9조원)만 늘었다. 인구당 지출은 2400유로로 이전 연도에 비해 200유로 늘었다. 30세 미만 인구를 기준으로는 8000유로로 이전 연도에 비해 600유로 늘었다. 총 GPD 중 차지하는 비중은 4.6%로 이전 연도에 비해 0.2%p 늘었다. 초중등 학교 예산이 절반가량 학교급별로는 초중등 학교 교육에 49%(970억유로, 약 168조원)가 사용됐다. 유아 보육 25%(490억 유로, 약 84조원), 고등교육 19%(380억유로, 약 65조원)가 뒤를 이었다. 나머지 7%(140억 유로, 약 24조원)는 저소득층 교육비 지원과 특수교육 프로그램 운영비를 포함하는 학생 지원비 4%(80억 유로, 약 13조원), 청소년 활동 지원 1.6%(약 30억 유로, 약 5조원), 기타 교육활동 1.3%(약 30억 유로, 약 5조원)이었다. 전문계 학생 개인별 지원금 폐지 등 연방 예산 감소 독일은 교육의 주정부 자치가 이뤄지고 있고, 연방 부처로는 교육·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가 여러 분야를 관리하고 있다. 이런 연방 정부 수준에서 이뤄진 교육비 지출은 전체의 약 55%인 110억유로(약 19조원)로 이전 연도보다 명목상 지출은 2억유로(1.6%) 감소했다. 하지만, 물가 상승비를 반영하면 사실상 4억 유로(4.6%) 감소한 셈이 된다. 가장 큰 감소 요인은 전문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인별 지원금 200유로를 주던 사업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연방 예산은 46%(50억유로, 약 8조원)가 대학에 지원됐다. 뒤를 이어 앞서 언급한 학생 지원비 34%(40억유로, 약 6조원), 학교 디지털 인프라 사업인 ‘디지털 팍트’가 13%(10억유로, 약 1.7조원), 기타 교육활동 5%(5억유로, 약 8600억원), 청소년 활동 지원 3%(0.3%) 순이었다. 보육은 지방정부에서 전적으로 담당했다. 주정부가 교육 예산의 3분의 2 넘게 감당 주정부 지출은 1350억유로(약 234조원, 68%)로 전체 교육비 지출의 3분의 2가 넘었다. 명목상 증가액은 90억유로(약 15조원)로 7%였으며, 물가상승비를 반영하면 실질적으로는 30억유로(약 5조원), 4% 증가했다. 그중 55%인 750억유로(약 129조원)는 초중등 학교로 지출됐다. 이어 대학 25%(330억유로, 약 57조원), 유아 보육 17%(230억유로, 약 39조원). 나머지 3%(40억유로, 약 6조원)는 학생 지원비, 기타 교육활동, 청소년 활동 등에 지출됐다. 시 단위의 기초 자치정부 지출은 26%인 520억유로(약 90조원)였다. 지난 연도에 비해 명목상으로는 10%인 50억유로(약 8조원), 조정액 기준으로는 7%인 25억유로(약 4조원) 늘었다. 기초 자치 정부 지출은 보육비가 49%(250억유로, 약 43조원)를 차지했다. 초중등 학교가 41%인 210억 유로(약 36조원)로 뒤를 이었다. 그 외 학생 지원비 5%(30억유로, 약 5조원), 청소년 단체 4%(20억유로, 약 3조원), 기타 교육활동 1%(5억 유로, 약 8600억원) 순이었다. 고등교육에 지출하는 예산은 없었다. 한편, 독일 통계청은 주교육문화부장관협의회와 교육·가족·노인·여성·청소년부 의뢰로 2년마다 공교육비 지출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다. 이전 회기인 2023년도까지는 ‘교육에 관한 공공 예산지출(Bildungsausgaben der öffentlichen Haushalte)’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었다.
더에듀 | “선생님은 아이의 성적만 책임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의 ‘삶’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몇 해 전 교장단 연수에서 한 강사가 한 말이 오래도록 필자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교육이란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아이 한 명 한 명의 인생에 ‘책임’을 지는 것임을 다소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교실을 돌아보면, 교사들이 그 숭고한 사명을 실천하기에는 현실이 결코 녹록지 않다. 최근 한국교육개발원(2023)의 조사에 따르면, 교사의 72%가 “학생 생활지도 과정에서 심리적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교육부 ‘2024 교원 인식 실태조사’에서는 교사의 10명 중 6명이 “문제행동 학생 지도를 주저하게 된다”고 응답했다. 교권 침해 사례는 2022년 3000여건에서 2024년 6000건 이상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이러한 수치는 교사들이 책임교육의 본질인 ‘학생 지도와 성장 지원’에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실제 한 중학교 교사의 사례가 주요 언론에 소개된 적이 있다. 수업 중 한 학생이 친구에게 폭언을 하고 물건을 던지는 일이 발생해 교사가 이를 제지하자 학부모는 “우리 아이를 가해자로 몰았다”며 항의했고, 결국 교사는 공식 사과를 해야 했다. 이후 그 교사는 “다음엔 그냥 모른 척하겠다”는 자괴감을 느꼈다고 한다. 책임을 다하려 한 교사가 오히려 상처를 입는 현실, 그 속에서 교육의 본질은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책임교육’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학업 성취나 규율을 관리하는 책임이 아니라, 학생의 인간적 성장을 함께 도모하는 마음과 자세에서 출발한다. 교사는 학생이 실수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어려움을 겪을 때 손을 내밀며, 잘못된 길로 갈 때 단호하지만 따뜻하게 멈춰 세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즉, 책임교육은 ‘성적’이 아니라 ‘삶’을 함께 짊어지는 교육이라야 한다. 그러나 이 이상은 개인의 헌신만으로는 지켜낼 수 없다. 교사가 책임교육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여기 몇 가지 필요한 사항을 제언해 본다. 첫째, 교사의 교육적 판단을 존중하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학교 현장에서 생활지도가 학생의 인권 침해, 아동 학대로 곡해되지 않도록 명확한 지침과 보호 체계가 강화되어야 한다. 2025년 현재 ‘교권보호 5법’이 통과되어 일정 부분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실질적 현장 적용은 여전히 미미하다. 진정한 보호는 교사가 두려움 없이 교육적 조치를 취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학생·학부모·교사 간의 신뢰 회복이 필요하다. 서울교육청의 ‘학교 신뢰도 조사’(2024)에 따르면, 학부모의 58%만이 “교사를 신뢰한다”고 답했다. 동양의 고전 『논어』에서 국가는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 했듯이 교육 역시 신뢰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학교는 교사와 학부모가 협력하여 아이의 성장을 공동으로 책임지는 ‘교육공동체’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가정에서도 교사를 감시의 대상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을 함께 돕는 동반자로 바라보는 문화가 필요하다. 셋째, 교사의 전문성과 돌봄 역량을 함께 키우는 연수 시스템이 강화되어야 한다. 단순한 행정 교육이 아니라, 학생 이해·심리 상담·갈등 조정 등 실질적인 인간 이해 중심의 연수가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 선진국 핀란드는 교사에게 높은 자율성과 함께 ‘전문적 돌봄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교사가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문화가 정착된 이유다. 우리도 교사를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닌, ‘전문적 인간 교육자’로 성장시킬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한 초등학교의 감동적인 사례가 있다. 과거 KBS 뉴스에 따르면, 인천의 한 교사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자주 결석하던 학생을 찾아가 상담하며 지역 복지센터와 연계해 도움을 받게 했다. 그 학생은 이후 학교생활에 적응했고, “선생님이 내 편이 되어주었다”고 말했다. 이것이 바로 책임교육의 본모습이다. 교사는 교실 안팎에서 아이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책임교육은 교사의 개인적 사명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사회 전체의 약속으로 완성될 수 있다. 교육이 단지 성적 경쟁의 장이 아니라, 사람을 사람답게 성장시키는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교사의 책임’을 함께 지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오늘도 수많은 교사들이 교실에서 묵묵히 아이들을 바라본다. 그들의 시선 속에는 단순한 업무가 아닌, 한 명 한 명의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내려는 진심이 담겨 있다. 그 진심이 꺾이지 않도록 가정과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문화, 그것이 바로 진정한 ‘책임교육’의 시작이라 믿는다.
더에듀 | 지금 이 순간에도 한 교사는 교실 앞에서 망설인다. 지도를 해야 할지, 아니면 참아야 할지. 아이의 거친 말투, 친구를 향한 무례한 행동을 보며 ‘바로잡아야 한다’는 직업적 양심이 먼저 떠오르지만, 곧 다른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괜히 지적했다가 학부모 민원이 들어오면 어쩌지.’ ‘혹시 아동학대로 오해받지는 않을까.’ 이 망설임 끝에 지도는 멈추고 교실의 질서는 조용히 무너진다. 교사는 아이를 가르치기 전 민원을 먼저 계산하는 사람이 된다. 기본 예절을 말해도, 질서를 세우려 해도 “왜 우리 아이만 지적하느냐”는 항의와 “아이의 기를 죽였다”는 민원 앞에서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 결과, 오늘날의 교실에는 ‘지도받지 않는 아이’와 ‘가르칠 수 없는 교사’가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기묘한 풍경이 자리잡았다. 물론 민원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정당한 문제 제기는 교육을 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통로이다. 그러나 지금의 민원은 점점 ‘개선 요청’이 아닌 ‘통제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교사의 전문성과 판단은 존중받지 못한 채, 지도 과정 전체가 ‘감정의 잣대’로 재단된다. 학생은 보호받고 있지만, 교육은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이 아니다. 신뢰이다. “우리 아이를 가르쳐 달라”는 사회적 믿음, 교사의 판단을 교육의 영역으로 인정하는 공동체의 신뢰 위에서만 교실은 바로 설 수 있다. 교사가 중심을 잡을 수 있어야 아이도 중심을 배운다. 교육은 어느 한쪽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일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교사를 감시하는 제도가 아닌 교사를 지켜주는 시스템이다. 지도가 가능한 교실, 훈육이 허락된 공간, 실수해도 설명할 수 있는 기회. 이 모든 것은 교사를 위한 특권이 아닌,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망이다. 교사를 지키는 일은 결국 아이를 지키는 일이다. 가르칠 수 있어야 배울 수 있다. 민원보다 교육이라는 상식이 교실로 돌아올 때, 무너진 교실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