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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THE교육] 콜로세움에 선 증오(憎惡) 사회

공론장을 짓밟는 정치, 국민이 바로 잡아야 한다

 

더에듀 | 요즘 필자 주변에는 “TV를 아예 보지 않는다”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치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이 국민을 피로하게 만들고, 공론장은 이미 혐오의 전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야는 국민을 설득하는 세력이 아니라 상대를 제거하려는 전투 집단으로 변했다.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적대의 언어가 정치의 일상어가 되었고, 국회는 민의를 대변하기보다 증오를 거래하는 시장이 되어버렸다.

 

이념의 진흙탕 싸움은 사회 전반으로 확산했다. 기업에서는 사용자와 근로자가, 학교에서는 교장과 교사가, 법원에서는 진보와 보수 판사들이 서로를 불신한다. 검찰과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가 국민의 피해의식을 자극하고, 그 분노에 조응(照應)하며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동안, 한국은 OECD 사회갈등지수 3위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대한민국은 이제 ‘팔꿈치 사회’로 변했다. 모든 것이 이항대립으로 구도화되었다. 정치가 팔꿈치를 휘두르고, 언론은 그 장면을 확대 재생산한다. 폴리페서들은 학자의 이름으로 진영을 대변하며, 학문과 양심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한때 사회의 양심이었던 종교계마저 침묵 속에 갇혀, 기도와 목탁 소리가 세속의 소음으로 들릴 뿐이다.

 

여당은 오만하고, 야당은 책임을 회피한다. 정책 논쟁 대신 ‘전 정권 타령’과 ‘내로남불’이 난무한다.

 

정치의 본질은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인은 갈등을 키우고, 그것을 팔아 표를 얻는다. 하버마스가 말한 ‘합리적 공론장’은 사라지고, ‘진영의 함성장’만 남았다. 마치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이 피를 흘리며 군중의 환호를 기다리던 장면처럼, 오늘의 정치가 ‘증오의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한 것이다.

 

토크빌은 “민주주의의 최대 위기는 자유의 남용이 아니라 무관심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정치가 입법의 절차로 빙의된 정치적 구호를 외치며 대중의 감정을 선동할 때, 무관심한 국민은 그들의 검투 경기를 묵묵히 지켜보는 관객이 된다.

 

그러나 이제 국민이 심판이어야 한다. 언론이 진실을 왜곡하면 시청률로, 정치가 부패하면 투표로, 종교가 침묵하면 양심으로 응답해야 한다.

 

에드먼드 버크는 “불의를 키우는 것은 불의가 아니라 우리의 무관심”이라 경고했다. 그 말은 오늘의 한국 사회에도 유효하다. 오염된 언어와 왜곡된 인식이 정화되지 않으면, 사회 전체가 그 탁류에 잠식된다.

 

마하트마 간디는 “진리는 언제나 소수의 편에 있다”고 했다. 굴절된 정의가 울림을 잃는 동안, 역사는 언제나 진실된 스승의 목소리를 기억해 왔다.

 

이제 교육계의 구루(guru·스승)들이 나서야 한다. 아이들에게 진리와 양심을 가르치고, 말의 품격으로 사회를 세워야 한다. 우리의 언어가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증오로 얼룩진 이 땅의 정치와 언어가 치유되려면, ‘진리의 민들레 홀씨’가 되어 곳곳으로 흩날려야 한다.

 

한국 사회는 지금 콜로세움의 검투사처럼 서로를 상처 입히며 생존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상대의 피가 아니라, 상처를 어루만지는 연민에서 비롯된다. 분열의 시대를 넘어, 공존의 언어로 다시 공론장을 세울 때 비로소 우리는 증오의 굴레를 벗어나 인간다운 민주주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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